화이불류(和而不流), 하나로 일관해 온 인생길
세상과 함께하면서도 휩쓸리지 않았던 인생
시·서·화 삼절, 이제는 국가에서도 인정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한생 연분이며 하날 모랄 일이런가. 나 하나 졈어 잇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졸 대 노여업다…' (〈사미인곡〉, 송강 정철).
1584년(선조17) 서인에 속했던 정철이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동인의 탄핵을 받아 대사헌직에서 물러나고 조용한 은거생활을 하기 위해 지었다는 송강정(松江亭).

지금은 담양군 죽녹원에 그 원형을 그대로 옮겨놓고 초암 박인수(법명 현수·광주교당) 훈장이 송강 정철을 대신해 세월 속에 묻혀진 가사문학을 비롯한 옛 선조들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있다.

그가 이곳에 살면서 직접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해날라 정자에 지피는 군불은 옛날 서당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학동들을 생각하는 스승의 마음이 엿보인다. 또 그의 방에 오래 묵은 벼루와 크고 작은 다양한 붓들은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을 완성시킨 그의 재량(才量)을 짐짓 가늠케 한다.

낮에는 죽녹원 문화체험마을을 찾아 송강정에 들린 이들을 맞이하느라 바쁘다. 그의 명필(名筆)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멀리는 제주도에서 이틀에 걸려 찾아온 이들도 있다. 가족이 함께 오는 이들에게 가훈을 써주고, 연인들에게는 멋들어진 시를 넣은 선면화(扇面畵)를 쳐준다. 또한 회사상호, 사훈, 혼서지, 상량문 등을 주문하는 사람들로 송강정 창호문이 닿아질 정도다. 심지어는 외출하고 들어오면 가훈 내용이 적혀 있는 메모지를 발견할 정도. 해가 지면 그대로 자고 새벽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좌선과 붓글씨로 문열이한다는 그에게는 아침마다 지게 지고 나무를 해 나르고, 장작을 패고, 아궁이에 불 지피고, 물 길어 오는 것들 자체가 헬스클럽에 다니는 셈이라는 괴짜스러운 면도 있다. 그러한 농(弄) 가운데 마음가짐과 예의, 선인들의 깊은 지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면 깊은 엄숙함이 묻어나온다.

올해 70세라는 나이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해학과 풍류에 능한 초암은 두 아들이 대학공부를 모두 마친 1999년, 늘 꿈꿔왔던 자신의 꿈을 위해 스스로 출가를 결심했다.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의 '월선서당'을 운영하면서 17년 동안 자신만의 예술 완성을 위해 매진했다. 원불교를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마을 작은도서관에서 발견한 '청풍월상시 만사자연명'의 글귀에 한 순간 매료돼 서당 현판에 새겨둘 정도. 이후 현화교당에 입교해 소태산 대종사 언행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모든 법문에 대종사님의 깊고 빼어난 사상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자력양성'에서는 제가 스스로 살아오고 정진한 예술 인생을 대변해 주신 것 같아 너무나 기뻤지요"라며 원불교 정신이 자신이 강조하는 점과 딱 맞다고 말한다. 송광정 한쪽 구석에는 작은 경상위에 소태산 진영이 그대로 모셔져 있다.

젊은 시절 시작해서 일궜던 '산업 미술' 사업도 접게 된 이면에는 어릴 적부터 늘 갈구해왔던 자신만의 삶과 철학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어려운 현장에서 일을 할 때도 쉬는 시간이면 지금과 같은 삶을 꿈꾸며 서예 연마에 정진했지요."

묵향에 묻혀 자신만의 서체와 화풍을 정립시켜, 지금은 전라남도를 대표하는 '시가(詩歌)' 스토리텔러로 작년에 선정될 만큼 나라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또 한국관광공사 주최로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2015 국제관광박람회' 때 시서화 대표로 참여해 그의 즉흥적인 서예 및 선면화 등이 현지인들에게 크게 주목을 받기도 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눈치보지 않고 해야 성공합니다. 여기 오는 젊은이들에게 늘 이 말을 해주고 있어요. 눈치 때문에 자신이 못하는 것을 잘하려 하거나, 잘하는 것을 구하지 않다 보면 인생을 허비하기 쉽습니다. 스스로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해야 자신에게 큰 힘이 됩니다."

남종화가인 아산(雅山) 조방원(趙邦元) 선생의 제자이기도 한 초암은 스승이 가르쳐준 내용을 주문처럼 되새기고 산다.

"자연이 가장 큰 스승이다. 자연을 바라보고 맑고 고운 성품을 지녀야 그에 상응한 맑고 고운 그림이 나오는 것이다" 부귀공명을 좇지 말고 산 좋고 물 좋은 두메산골에서 초막 짓고 농사지으며 자연을 벗 삼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는 가르침이다.

어릴적 서당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끊임없이 키워 오고 닦아온 초암의 인생길. 때로는 5·18광주민주항쟁과 같은 국가적 사태에도 등돌리지 않고 민중들과 그 시류를 함께했다. 또 가정을 꾸려야 하는 가장으로 모진 현실 앞에서도 꿈이 그 안에서 푹 익어가기를 기다릴 줄 알았다. 그러한 인내가 마침내 대기만성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하고 싶었던 글과 그림을 마음껏 즐기며 사는 지금의 삶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자신이 감동할 줄 알아야 상대방이 감동하고 모두가 감동하게 된다"는 그의 말 속에는 시류와 함께하면서도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화이불류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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