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자의 삶 1

▲ 정도성 도무/원경고등학교 교장
나는 어릴 때부터 허황되다고 느끼는 것은 다소 싫어하는 기질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다들 재미있어 하는 서커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가짜라고 여겨서일까, 심지어는 튀밥이나 뻥튀기도 싫어했으니 말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부산 남부민교당에 입교하고 교당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가장 마음이 놓였던 것은 이적을 보이지 않고 오직 인도상 요법을 주로 했던 대종사의 교법이었다. 진짜라고 생각했다.

군대를 갔다 와서 남부민교당 청년회장을 맡았다. 그 때 1987년 6월 항쟁을 겪었다. 어느 곳보다 격렬하게 전개되었던 부산에서 민주화운동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던 나에겐 6월 항쟁이야말로 개벽의 상두소리 같이 느껴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몇 년째 중단되었던 학업을 잇기 위해 늦은 나이에 대학을 들어가서 문학을 공부했다. 사회적인 격변이 동시대를 사는 개인의 삶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는지를 그때 깨달았다. 그 뒤에 나는 동래교당과도 인연이 되어 청년회장을 했고, 다음해엔 부산동부교구 청년연합회장을 2년간 맡아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개혁적 성향의 청년 모임인 '금강의 주인' 활동으로 이어졌다. '금강의 주인'은 교단 혁신뿐 아니라 반핵 성지수호운동, 사회개벽운동 등을 원불교 청년들의 관점에서 참여한 매우 역동적인 모임이었다.

'금강의 주인'은 좌산종법사 취임 후, 지역 단위의 모임으로 전환했고 자연스럽게 해체됐다. 나는 당시 부산에서 활동했던 회원들을 데리고 남산교당에 들어가 청년회를 창립했다. 초대 청년회장을 하면서 공부하는 청년회를 만들기 위해 정성을 들였다. 법문 스티커를 만들어 원불교를 알리는 데 주력했고, 주말을 이용하여 1박2일 정기훈련을 분기별로 시행했다. 법회 때마다 경강을 발표해 지도교무의 감정을 받았고, 교구 교리퀴즈대회에서 우승도 했다. 또한 남산교당 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부산교구환경연구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이런 청년회 활동과 교리공부 과정을 통해 대종사 교법을 더 깊이 만날 수 있었고, 이것이 출가의 한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이때 나는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여상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던 어느 날,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이 문득 비루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느끼니까 정말 어쩌지 못하고 쩔쩔매기 시작했고, 하루하루가 재미없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한 편으론 출가를 한다면 이런 무의미성을 극복하고 대종사의 교법으로 좋은 세상을 만드는 작업에 동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섬광처럼 들었다. 그러나 출가를 결행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때가 36살. 일 년을 거의 어쩌지, 어쩌지, 하며 조바심쳤다. 잠을 자다가 일어나서 자고 있는 식구들을 내려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밤이 늘어났다. 나는 이미 나이도 많고 결혼도 했는데, 결혼을 해서 아내가 있고 자식이 둘이나 있는 자가 출가라니, 하면서 도리질하다가 그럼 이대로 살아야 하는가, 하고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아득하고 막막했다. 결국 학생 시절 한 때 출가를 꿈꾼 적이 있었던 아내가 거리낌 없이 정토가 되겠다고 하여 한 매듭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당시 가까운 교무님과 상의했더니 내 처지로는 교무로 출가하기 어려우니까 도무품과로 출가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전공도 살리고 출가하는 것이니 더 낫지 않겠느냐는 말에 아무 것도 몰랐던 나는 그저 출가를 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품과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당시 교육부장이었던 김현 교무님을 만났고, 만삭인 아내와 버스로 영산성지까지 가서 하룻밤을 자고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영산성지고등학교로 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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