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석타원 김혜실 교무님이 갑자기 열반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가족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초재에서 종재까지 지내는 동안에도 우리 가족은 섭섭하기 한이 없고 무언가 큰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아 아쉽기 그지없었다. 석타원님과의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장수교당에서 이뤄졌다.

당시 나는 장수경찰서로 부임을 받아 이사를 해야 하는데 이사할 집을 얻지 못해 경찰서 부근 어느 선술집 문간방을 얻어 살게 됐다. 방이 좁아 이삿짐을 다 넣지도 못하고 문 앞 도로변에 쌓아둔 짐을 김혜실 교무님이 보고 하도 딱하여 지엽사에서 손수 도구를 구입해 와 그날 밤 바로 교당 문간방을 수리하여 이튿날 아침에 일찍 이사를 시켜줬다. 우리 가족은 그때 받은 은혜를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 석타원님은 당시 현직 경찰관이었던 나에게 공무를 집행하다 보면 갑자기 경계에 부딪히기도 하는데 그때 취사의 표준을 무아봉공, 이소성대, 자리이타로 하라고 했다. 그 가르침으로 공직을 무사히 마치고 정년퇴임하여 걱정 없이 잘 살고 있다.

그 인연으로 우리 부부와 자녀 6남매들은 모두 일원가족으로서 건강하게 병원장으로, 약사로, 은행원으로, 통신사 및 건설업계 임직원으로, 연예기획사대표로 활동하며 사회에 봉사하며 살고 있다. 모두 석타원님의 크신 은혜다. 석타원님이 현직에 있을 때 소남훈련원, 장황교당, 대마교당, 영산선학대학교, 배내청소년훈련원 등을 거쳐 정년퇴임하여 열반하기 전까지 우리 가족은 설명절, 추석, 스승의 날 행사 때 꼭 한두 번씩 찾아뵙고 인사를 했다.

석타원님은 특히 장계교당을 개척할 때에 한숨도 쉴 새 없이 바쁜 일과 속에서도 교당 근교에 텃밭을 개척해 채소 등을 가꾸어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았던 자비보살이었다. 석타원님은 이렇듯 교도 순교를 할 때에도 손길 닿는 곳, 발길 머무는 곳, 음성 메아리치는 곳마다 성불제중의 인연을 맺어 대종사의 교법을 심어주고자 노력을 많이 한 선진이었다.

우리 부부는 딸만 5명을 낳고 아들이 없었는데 장수교당에 다니면서 아들을 얻어 큰 경사를 입었다. 그때 석타원님은 아들을 좌산상사님에게 연원을 달고 박종선(種善)이란 법명을 받아 주었다. 나는 법명을 호적에 올렸다. 이후 석타원님은 종선이를 결혼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끝내 결혼 성사를 보지 못하고 열반한 것이 참으로 아쉽다. 하지만 석타원님은 원불교 결복 2세기를 맞이하여 또다시 와서 훌륭한 성자로, 우리 가족과 인연을 맺어줄 것으로 믿는다.

<동전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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