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발트 블루 사랑했던 색면추상의 선구자
'오방색'과 '민화' 현대성 간파한 실험적 시도

▲ 통영 미륵도의 미륵산 자락에 위치한 전혁림미술관에는 현대미술의 대가, 바다의 작가라 불리웠던 전혁림 화백의 작품 80여점과 관련자료 50여점이 소장돼 있다.
▲ 전영근 관장. 거스를 수 없는 운명처럼 화가로 자라난 전혁림 화백의 아들이다.
"푸른색이 좋십니까?" "글쎄, 푸른색으로 칠하모 마음이 편해지네. 니는 보기에 안 좋나?" "아부지 좋으시면 저도 다 좋십니다."

'어느 날 유품을 정리하다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푸른 물감으로 흠뻑 물든 붓을 잡고 있는 아버지의 투박한 손을 촬영한 사진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버지의 손등이나 손톱은 항상 푸른 물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물감을 씻어내고 그 위에 새로운 푸른 물감을 덧칠하고, 또 씻어내고. 새 물감이 물드는 과정을 반복하며 아버지의 손에 새겨진 푸른 흔적은 마치 아름다운 문양과도 같았다.' 지금도 아들은 아버지의 투박한 손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코발트 블루를 사랑한 화가, 현대미술의 대가, 바다의 작가라 불리웠던 전혁림 화백. 그가 나고 자란 통영으로 향했다. 2년 전 96세로 생을 다하는 날까지 푸른 물감의 붓을 놓치 않았던 전혁림 화백의 작업 공간, 전혁림 미술관이 그곳에 있다.

현대미술의 대가, 전혁림

전혁림미술관은 통영 미륵도의 미륵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세라믹타일 7,500여장으로 조합된 미술관 건물의 외벽이 마치 전혁림 화백의 실험적 작품세계 만큼 독특하다. 미술관 관장은 전영근 화백. 거스를 수 없는 운명처럼 화가로 자라난 전혁림 화백의 아들이다.

"30여년 가까이 살던 집을 헐고 2003년 2월 첫 삽을 떴는데, 당시 아버님 연세가 87세였다. 우연히 그날 아버님이 크게 다치셨다. 아버님 살아계시는 동안 미술관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에 밤낮으로 매달려 3개월 만에 개관했다. 모든 것을 직접 내 손으로 작업했다. 다행히 아버님 건강이 호전되셨고, 이곳에서 아버님이 7년 동안 작업하셨다"고 전 관장이 당시를 회상했다. 아버지를 위한 미술관을 짓고 유지하기까지, 그 지난했던 설움의 시간들을 전 관장은 잘 버텨냈다. '지독한 고독'을 성벽처럼 쌓아놓고 오로지 '화가'로서의 길을 걸어왔던, 영감이 떠오르면 불편해진 노구를 아랑곳 하지 않고 캔버스를 빚어대며 행복으로 가득했던, 아버지의 눈빛을 결코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 전혁림을 가장 많이 닮은 이가 바로 그, 전 관장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통영 어촌에서 태어나 당시에는 생소했던 서양화로 청년의 꿈을 시작하셨다. 1세대 서양화가 대다수가 그러했듯 그림에만 매진하기에는 힘겨운 시대였고, 모진 풍파의 연속이었다." 전혁림 화백은 피난지였던 부산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화백의 연륜(1916년생)이 말해주듯, 현대사의 격동기와 다양한 문화 변동을 살아낸, 이 시대 원로 대화가 중 한 사람이다. 전 관장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붓을 놓고 있는 때가 거의 없는' 화가였고, '내 예술이 옳다는 확고한 당신만의 믿음이 강했던' 그런 사람이다.
▲ 미술관 2층에는 60개의 모반이 모여서 하나의 작품, 새(new) 만다라를 구성하고 있다.
전혁림미술관 그림 산책

미술관에는 전혁림 화백의 작품 80여점과 관련자료 50여점이 소장돼 있다. 전혁림 화백의 그림 속으로 산책을 떠난다.

아침(1950년, 캔버스, 유채). 바다 위에 얽히고 설킨 돛배들, 그리고 돛과 돛 사이로 아침 해가 들어와 붉게 물든 바다를 그리고 있다. 화백에게 통영 아침 바다의 활기와 생명력은 삶의 희망이었으리라. 화가 전혁림의 1950년대 예술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푸른 노을(1953년, 캔버스, 유채). 논일을 하는 것이 삶의 원천이었던 시절, 논과 밭을 간다는 것은 있는 힘을 다해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희망을 대변하는 것이다. 고된 삶 속에서도 사람들이 희망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아낸 작품이다.

전혁림 화백의 또 다른 작품 세계는 목기·도자 회화다. 한국 전통 목기나 지함, 도자기에 전혁림식 추상회화를 수놓은, 화려하면서도 전통적인 작품들이다. 꽃단지(11cm×10cm, 1965년, 도자기), 주병(18cm×12cm×22cm, 1965년, 도자기). "캔버스와 달리 삼차원의 면에 붓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균일하게 그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자그마한 단지에 세밀한 문양을 그리시는 것을 보며 정말 감탄했다. 예술적 영감만 타고난 것이 아니라 그걸 뒷받침하는 손의 기능까지 타고난 예술인이라 생각했다." 전 관장의 설명이다.

빼놓을 수 없는 전혁림 화백의 대표작은 목기에 그린 추상화다. 미술관 2층에는 60개의 모반이 모여서 하나의 작품, 새 만다라(200cm×120cm, 2007년, 모반, 유채)를 구성하고 있다. "아버지의 만다라는 사실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만다라의 구성과 시각적 요소들을 차용하여 화가의 예술세계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만다라의 보편적 의미가 아닌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고 해서 '새(new)만다라'라고 한다." 이 작품 이전, 전혁림 화백은 목기 1050개가 어울려 빚어내는 거대한 파노라마 '만다라'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아흔이 넘는 고령에도 5년 동안 혼을 쏟아 부어 완성한 필생의 역작이다.

전혁림 화백은 이후 전통적인 '오방색'과 '민화'가 지닌 현대성을 간파한 실험적 시도를 통해 또 한번의 족적을 남긴다. 한국의 색과 형태와 질감을 현대적 감각으로 표현, 전통을 떠난 민족예술이 없음을 증명했다.

"예술은 철저하게 목숨과 대결해서 얻어야 한다"고 아들에게 말했던 화가 전혁림. 그의 아들은 이제 "아버지에게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한 답을 얻었다. 그 이상의 답을 얻기 위해서 살겠다. 내가 숨 쉬는 의미다"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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