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자의 삶

▲ 정도성 도무/원경고등학교 교장
둘째 아이는 음력 정월대보름에 태어났다. 1997년 당시 양력으로 2월21일인데, 개학이 얼마 남지 않아서 나는 이틀 후에 영산성지로 달려갔다. 얼굴이 퉁퉁 부은 아내와 갓난아기를 두고 울산에서 영광까지 가는 길은 참 멀었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이었다.

영산성지고는 1987년부터 학교를 벗어난 학생들을 모아 대안교육을 해오던 학교였고, 1996년 안병영 교육부장관의 방문으로 큰 주목을 받아 정부 인가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내가 간 해는 아직 미인가 상태였다.

급료가 워낙 낮아 교사들의 이동이 심했는데, 당시에 정규 학교에서 근무하다가 이동해 온 교사는 내가 처음이었다. 가자마자 3학년 담임과 학생부장을 맡아 정말이지 그동안 살면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아이들과 부대꼈다. 자리를 잡아가는 일은 아이들이나 나나 매한 가지로 힘들었다.

참으로 버거운 교육활동이었다. 학생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볼 때마다 내 역량이 부족함을 한탄했고, 교육이 무엇인가를 회의했고, 내 업장이 두터움을 확인해야 했다. 사고를 낸 학생들을 데리러 경찰서에 가서 머리를 조아렸고, 지리산에 가지 않겠다고 약을 먹은 학생을 차에 태우고 응급실로 달려갔던 일, 밤에 복도 유리창을 때려 부수는 녀석들을 끌어안은 일, 이밖에 필설로 표현하지 못하는 무수한 일들을 겪으며 한두 해를 보냈고, 영산성지에 들어간 1997년 한 해를 사느라 나는 거의 10년의 공력을 다 들인 것 같았다. 부산에서 가져 간 전세금마저 다 써버리고 이제 어찌 해야 좋을까 고민이 깊어질 때 1998년 학교가 정부 인가를 받았다.

정규 학교가 되고 1년 간은 새 학교로 출발하기 위한 체제 정비에 온통 정신을 쏟았다. 그러다가 1999년 그만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열흘 가까이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면서 입원해 있어야 했다. 퇴원하고 나서도 한 달간은 온몸에 진기가 빠져나간 듯 몸을 가누기가 어려울 정도로 힘이 들었다.

시련은 이어졌다. 자녀 셋을 가지고 싶었던 정토의 소망에 따라 셋째 아이가 태어났는데, 애지중지하던 아이가 100일을 넘기고 이내 세상을 떠난 것이다. 2000년 3월이었다. 나도 많이 슬펐지만 정토는 갑상선 항진증에다 심한 우울증까지 겹쳐서 눈물로 지내는 날이 많았다. 낯선 땅의 외로움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고, 학생 교육의 고단함과 아울러 철학의 빈곤으로 인한 학교 내부의 여러 가지 갈등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나의 출가행은 이토록 무모한 일이었을까.

그러나 이런 어려움이 닥쳐와도 나와 정토는 한 번도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 번도 출가를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직 출가를 꼭 이루겠다는 일념이 나의 중심이 되어 줬다. 나는 힘이 들 때마다 대각지를 찾았다. 허청허청 걸어가서 대각지 만고일월비 앞에 서면 눈물이 났고 마음이 가라앉았다. 때로 감응해 주기도 했다. 업장이 어찌 이리 두텁냐며 아파하기도 하였지만, 업장 소멸하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심고도 많이 올렸다. 대각지가 있어 그렇게 나는 위안을 받은 것이다. 대각지 노루목 팽나무 그늘 아래 앉으면 가끔 시가 찾아오기도 했다. 묶어서 2001년에 시집을 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원기86년, 영산성지로 온 지 5년만에 총8회의 예비도무 훈련을 마치고 출가식을 했다. 고향의 부모님, 형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달려왔던 출가였다. 영산성지고에서 중도 탈락을 경험한 학생들과 전혀 새로운 교육을 하였고, 미인가에서 인가로 넘나들면서 대안교육의 기틀을 잡아가는 신고의 세월 속에 맞이한 출가였다. 감회가 없을 수 없었다. 출가식에서 나는 말했다.

"작은 집을 나와 큰 집으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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