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택 원로교무
25장은 교화는 교화하는 바가 없다는 뜻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汝等이 勿謂如來作是念호대 我當度衆生이라하라 須菩提야 莫作是念이니 何以故오 實無有衆生如來度者니 若有衆生如來度者인댄 如來卽有我人衆生壽者니라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너희들이 여래가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중생을 제도한다" 하리라고 이르지 말라. 수보리야! 이러한 생각을 하지 말지니, 어찌한 연고인고 실로 중생을 여래가 제도함이 없나니, 만일 중생을 여래가 제도함이 있다 할진대 여래도 곧 아상과 인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이 있는 것이니라."

여기에서는 부처님 스스로가 자신을 비판하는 것이다. 여래가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면 이는 여래 자신이 사상(四相)에 집착 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중생 제도를 하고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아(無我)의 극치를 보여 주는 것이다.

한국은 독특하게 문화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다. 불교가 들어와도 유교가 들어와도 기독교가 들어와도 다 융창한다. 세계 어느 문화가 들어와도 우리 민족은 충돌하지 않고 다 수용하고 자기화 할 줄 아는 능력을 가졌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독특한 우리화 된 문화를 창조해 내고 있고 이를 수출하고 있는데 한류 문화가 그 증거이다.

須菩提야 如來說有我者는 卽非有我어늘 而凡夫之人이 以爲有我라하나니라 須菩提야 凡夫者는 如來說卽非凡夫일새 是名凡夫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내가 있다고 한 것은 곧 내가 있지 아니한 것이다. 범부들은 내가 있다고 한 것에만 집착한다. 수보리야! 범부라 함은 여래가 곧 범부가 아니라고 말할새 이것을 범부라 이름하나니라."

"내가 있지 아니하다"는 것은 차별 현상의 인간 붓다가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인 법신 붓다라는 것이다. 부처는 부처와 범부를 구분하지 않지만 범부들은 범부와 성인을 구분한다. 특히 이 장에서는 부처가 자신을 스스로 비판하듯이 우리도 자신 비판에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는 생각, 낫다는 차별심을 없애야 한다.

나는 목적에 따라 지자도 될 수 있고, 우자도 될 수 있다. 인간의 역할은 아주 다양하기 때문에 구하는 목적에 따라 지자와 우자를 구분하자는 것이 대종사의 정신이다.

〈대종경〉 전망품에 인명의복활조전(人名衣服活造傳)이라고 했다.

과거 선천시대의 종교는 기성복이라면 우리는 맞춤복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지자와 우자는 필요에 따라 일시적이고 순간적으로 있어지고 없어진다.

26分은 법신은 모습이 없다는 뜻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不아須菩提言하사대 如是如是니이다 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니이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가히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 수보리 말씀하되, 그러하고 그러하옵니다.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보겠나이다."

수보리의 대답은 지금까지 〈금강경〉의 논조와는 다르게 전혀 다른 논조가 나왔다. 야부선사는 주석에서 "진흙으로 빚고 나무로 조각하여 비단에 그림이여! 만약 이것을 여래의 모습이라 하면 우습도다"라고 비판하였다. 여기에서는 수보리가 스스로가 틀린 줄을 알면서 틀린 대답을 한 것이다.

佛言하사대 須菩提야 若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者인댄 轉輪聖王도 卽是如來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수보리야! 만일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진대 전륜성왕도 곧 이 여래라고 해도 될 것인가?"

전륜성왕(cakravarti-raja)이란 '바퀴를 굴리는 왕'이란 뜻으로 여기에서 바퀴란 인도 고대의 성왕이 가지고 있었던 무기를 상징화한 것으로 적진에 자유자재로 굴러다니면서 적을 분쇄하는 무기인 것이다. 불교에서의 법륜(法輪)은 부처님 법설로 우리의 무명(無明)을 쳐부수는 것을 상징화 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불법(佛法)을 가지고 있는 분이고 전륜성왕은 위정자(爲政者)이다.

대종사는 정치와 종교의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하셨듯이 각자의 역할이 있다. 전륜성왕도 삼십이상을 구비했고 탁월한 지도자라고 해서 여래로 볼 수 있겠냐고 부처님이 비꼰 것이다.

須菩提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如我解佛所說義컨댄 不應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니이다

"수보리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시되,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의 말씀하신 뜻을 아는 바와 같아서는 마땅히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가 없나이다."

형상있는 것은 모두가 가변(可變)적이기 때문에 수보리는 바로 삼십이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다고 대답을 바꿨다.

爾時에 世尊이 而說偈言하사대 若以色見我커나 以音聲求我하면 是人은 行邪道라 不能見如來니라

"이 때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설하여 말씀하시되, 형체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지 말라. 이는 사도(邪道)를 행함이니 결단코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사구게로 법문을 마무리 한다. 수보리는 일부러 틀린 대답을 바루면서 제자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한 것이다. 대중들이 부처님의 법을 잘 받들 수 있도록 한것이다. 대종사와 정산종사의 관계와 같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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