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삼선공원이 들어서 있는 서울 최초 신축교당 돈암동터에서 산수교당 서문성 교무가 서울원문화해설단에게 대종사 성적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 개벽순례 창신길 코스.
교단 초기 소태산 대종사가 만19년간 1백여 차례 이상 방문한 경성(京城). 대한민국 수도 경성은 박사시화(朴四時華) 대봉도, 박공명선 선진, 이동진화·이공주 종사를 비롯 대종사와 지중한 인연들의 만남이 이뤄진 곳이다. 영광(영산)지부, 익산본관에 이어 세 번째로 전법교화를 펼친 경성출장소(창신동)는 새 회상 교화지로서 한 나라의 수도에 출장소를 설치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원불교100주년기념대회를 20여 일 앞두고 서문성 교무, 서울원문화해설단과 함께 대종사의 경성 발자취를 따라 걸었다. 동대문성곽공원~서울교당 창신동터~낙산~서울교당 돈암동터로 이어지는 '창신길 코스'다.

한국 최초부인병원, '동대문부인병원'

화창한 봄기운이 만연한 날, 서울원문화해설단과 서문성 교무를 동대문성곽공원에서 만났다. '창신길 코스'의 출발지인 동대문성곽공원은 현대적인 건물과 고즈넉한 흥인지문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 곳에는 옛 '동대문부인병원'의 터를 알리는 표석이 있다.

동대문부인병원은 한국 최초의 부인병원이다. 감리교 스크랜튼 목사가 1887년 미국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부에 병원 설립기금 요청서를 제출하고 같은 해 10월 미국 여의사가 내한해 이화학당 구내에서 치료를 시작했다. 명성황후는 이 병원에 보구여관(保救女館)이라는 이름을 하사했고 정동에 있던 보구여관이 동대문으로 이전을 해온 뒤 이 병원과 통합돼 1930년부터 '동대문부인병원'으로 불렸다.

황정신행 종사와 부군은 부인선교사 유지재단으로부터 종로 6정목 70번지, 11,880㎡의 대지에 4층 병원 건물1동과 2층 주택건물로 되어있던 동대문부인병원을 인수했다. 황정신행은 자택으로 소태산 대종사를 초빙해 식사를 대접했으며, 일본군 '위안부'를 면하기 위해 박은섭, 이용진, 송자명, 송영봉, 정양진, 김서업 등이 이 병원에 취업하기도 했다. 동대문부인병원에서 근무하는 여자청년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월급을 받으면 총부로 보내 자신들의 공부 비용을 스스로 만들고 야간 수당으로 생활해 나갔다.

현재 이 곳에서 병원의 옛 모습은 찾을 수 없다. 과거 회나무 한 그루만이 옛일을 간직한 채 외롭게 서 있었지만 이 마저도 도심공원이 조성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동대문성곽공원을 중심으로 <불교정전>을 인쇄하고 편집하는 수영사가 있었던 청계천 옆, 대종사가 오르고 내렸던 '동대문 종점(현 동대문 앞 도로와 동대문 종합시장 주차장)'등을 찾아볼 수 있다.
▲ 창신길 코스의 출발지인 동대문성곽공원에는 옛 동대문부인병원 터를 나타내는 표석이 있다.

성주(聖呪)법문, '창신동터'

약간은 가파르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경성출장소가 있었던 창신동터에 도착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경성역에서 전차를 타고 동대문 종점에 내렸고, 창신동 골짜기를 따라 이곳에 도착했을 것이다.

경성출장소는 이동진화 선진이 자신이 수양채로 사용하고 있던 시가 1000여 원의 대지(목조 초가 5칸 1동, 4칸 1동, 대지)를 희사해 마련됐다. 경성출장소는 10일에 한 번씩 보는 매 6일 예회로 10여 명 정도가 모였으며, 방이 비좁아 무릎이 서로 맞닿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원기11년 소태산 대종사가 상경하자 송도성 교무와 경성출장소 회원들이 창신동 출장소에 모였다. 대종사는 재가선법과 고락의 원인에 대한 법설을 한 뒤, 한 시구를 지어 성성원에게 줬다.

"영천영지영보장생 만세멸도상독로(永天永地永保長生 萬世滅度常獨露)." 이공주, 성성원뿐만 아니라 경성출장소 회원들은 이 시구를 틈틈이 외우며 공부했고, 훗날 영혼천도를 위한 성주(聖呪) 법문이 됐다.

서문성 교무는 "총부를 제외한 지방 교당에서 대종사가 가장 많은 법문을 설한 곳이 이 곳 창신동이다"며 "더 많은 기록들을 유추하고 찾아나가야 하는 일이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재 창신동터는 어린이집과 한옥으로 분리된 건물이 들어서 있다. 멀리서 바라봐야 하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잠시나마 눈을감고 옛 경성출장소를 상상해볼 수 있었다.
▲ 원기83년 서울교구가 세운 돈암동터 성적비.
서울 최초 신축교당 '돈암동터'

'낙산'은 낙타 모양이라고 붙여진 이름으로 주민들에게는 성(城)이 있는 산, '성산'이라고도 불렸다. 낙산 이화 벽화마을을 뒤로한 채 정상에 오르면 이화장(梨花莊)이 발 아래에 놓인다. 황정신행이 9,900㎡를 매입해 집을 지은 이화장은 1988년부터 이승만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의 유품을 전시하고,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낙산공원에서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원불교 서울 최초 신축교당인 '돈암동터'가 나온다. 창신동 회관이 회원의 증가로 장소가 협소해 어려움을 겪게 되자 이공주가 돈암동 낙산아래 앵두나무골을 물색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공주, 경성 회원들과 이곳을 둘러보고 "수도원 기지로는 하늘이 주신 곳이다"라고 말했다.

원기18년 낙성식을 하고 서울 최초의 신축교당이 세워졌다. 돈암동 회관은 일식과 양식을 절충한 신식 12칸 목조 기와집으로 법당에 300여 명까지 수용이 가능했다. 또 기존 별채 건물을 합하여 총 20여 칸이 넘었다. 원기31년 돈암동 회관이 도심에서 외곽지대에 위치해 있어 많은 불편을 겪어오던 때라 정각사로 임시 이전하게 됐고, 그 후 용산에 있는 용광사를 인수해 서울지부를 이전한 바 있다.

현재 돈암동터는 학교법인 한성학원 소유토지로 삼선공원(현 삼성동)이 들어서 있다. 공원 오른편에 위치한 표석이 이 곳이 옛 돈암동 회관이었던 것을 알린다. 원기83년 서울교구가 세운 이 성적비에는 '원기18년(1933) 원불교에서 서울지역 최초로 신축교당을 설립하여 현 원불교 서울교화의 모태가 되었던 자리'라고 적혀있다.

동대문성곽공원~서울교당 창신동터~낙산~서울교당 돈암동터를 잇는 창신길 코스는 과거와 현대, 문화와 만남이 공존하는 길이다.

틀 속에 짜여진 일상을 훌훌 털고 길을 걷다보면 이런저런 시름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다. 혼자 걸어도, 함께 걸어도 좋은 이 길 위에선 누구라도 풍경이 되고 역사가 될 것이다.

교단이 원불교100주년기념대회를 맞아 소태산 대종사의 경성교화 발자취를 따라 걷는 개벽순례 코스를 개발하고 이를 안내할 '서울원문화해설단'을 양성했다.
본지는 4월 한 달간 해설단과 함께 순례길을 걸으며 이를 소개한다. 지상에서 만나본 소태산 대종사의 경성교화 발자취로 교단 2세기 서울교화를 다시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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