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택 원로교무
何以故오 須菩提야 以諸菩薩이 不受福德故니라 須菩提- 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云何菩薩이 不受福德이니꼬 須菩提야 菩薩의 所作福德은 不應貪着일새 是故로 說不受福德이니라

"어찌한 연고인가? 수보리야! 모든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아니하는 연고니라. 수보리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되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아니한다 하시나이까? 수보리야! 보살의 지은 바 복덕은 마땅히 탐착하지 않을새 이런 고로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설하나니라."

지난주 28분 앞부분에서 "지일체법무아(知一切法無我)하야 득성어인(得成於忍)"라고 하여 무아를 알아 참음을 얻는 공덕이 칠보보시 보다 더 큰 이유를 설명하였다. 아무리 많은 칠보보시라 할지라도 물질적인 것은 한계가 있지만 모든 경계에서 무아를 이루게 되면 한량없는 공덕을 쌓기 때문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부처님은 설명하고 있다.

"불수복덕(不受福德)"이라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받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받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받되 육바라밀 수행에서 첫번째가 보시라 하였듯이 다시 베푸는 것을 말한다. 오고 가는 가운데 서로 은혜가 나타나게 되면서 서로 상생이 되고 진급이 된다.

주고받는 것이 아주 자연스런 경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영산 방언공사를 할 때에 대종사는 공사비가 부족하자 구인 제자 중에서 살림이 넉넉한 팔산을 불러 돈을 빌려달라고 하였다.

팔산이 없다고 거절하자 대종사는 벽장문을 열어 엽전이 쌓여 있는 것을 보여 줬다. 그 뒤로 팔산은 돈 뿐만아니라 나중에는 부엌 문짝까지 떼어다가 방언공사를 마치게 되었다.

교당에서 유지비 보은금을 낼 때 아낌없이 기쁜 마음으로 내야 한다. 이 유지비로 교당 운영이 잘 되어 대종사의 법을 세계만방에 전하는데 밑거름이 된다는 마음으로 내는 것과, 돈도 없는데 아까워하면서 내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베풀 때는 아낌없이 베풀고, 받으면 또 베풀어 복덕을 탐하지 않는 불수불탐분의 보살의 경지를 얻어야 하겠다.

29분은 "위엄 있는 그 모습 고요하기도 하다"라는 뜻이다.

須菩提야 若有人이 言호대 如來若來若去하며 若坐若臥라하면 是人은 不解我所說義니 何以故오 如來者는 無所從來며 亦無所去일새 故名如來니라

"수보리야! 만일 어떠한 사람이 있어 말하되 "여래가 혹 오고 혹 가며 혹 앉고 혹 눕는다" 하면 이 사람은 나의 설한 뜻을 알지 못함이니, 어찌한 연고인고? 여래는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으며 어디론가 가는 바도 없다. 그런 고로 여래라고 이름하나니라."

거래좌와(去來坐臥)는 우리 삶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래를 거래좌와 한다고 말을 하면 부처의 뜻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현실적으로는 분명 거래좌와를 하는데 그 뜻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의두요목 1조에서 부처님은 도솔천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왕궁가에 오셨다고 하였듯이, 여래라는 말은 오는 것 같지만 온 것은 아니다.

도솔천에 있는 마음상태와 왕궁가에 있는 마음이 서로 다르지 않고 본질적으로 같다는 뜻이며 이를 불리자성(不離自性)이라 하여 여여한 그 자리를 뜻한다.

부처님은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 항상 자성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와도 온 바가 없고 가도 간 바가 없다. 현실적으로 오면 분명 온바가 있고 가면 분명 간바가 있지만은 성품자리에서는 거래좌와가 끊어져 분별이 끊겨 있다. 부처님은 일상생활 속에서 이 성품자리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여래의 반대는 여거(如去)이며 이는 거래의 자유를 얻은 상태를 말한다. 대산종사 법어 법위편에서는 "천여래 만보살의 대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리에 토가 떨어져, 와도 온 바가 없고 가도 간 바가 없는 그 자리에 들어가야 하느니라"했다.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은 거래의 자유를 얻어 올 때 멋지게 오고 갈 때 멋지게 가는 것이다. 더 나아가 죽어서만 그런 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 거래의 자유를 얻어 어딜 가든 어디에 있던지 마음에 변화가 없어야 한다. 공부가 덜 된 사람은 장소나 환경이 변하게 되면 거기에 구속되어 마음에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바깥의 외경에 끌리어 항상 시비이해의 분별을 놓지 못하고 늘 괴로움속에서 고를 받게 되는 것이다.

여래가 와도 온바가 없고 가도 간바가 없다는 것은 소유의 개념이 확장된 상태를 말한다. 범부 중생의 소유 개념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한정되어 있지만 부처님은 시방세계를 자신의 소유물로 삼는다. 이를 다른 말로 개인적 자아를 사회적 자아로 확장시킨 다는 것이다.

'나'라고 인식하는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으로 남편·아내·부모·경찰관·기관장 등 다양한 역할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을 사회적 자아라고 한다. 이렇게 소유 개념의 확장과 자아 개념을 확장 시켜 나가게 되면 우주만유와 하나가 되어 '나' 아닌 것이 없게 되고 결국 무아(無我)를 이루게 된다.

서양의 진리관은 시작과 끝이 있고 동양의 진리관은 시작이 없기 때문에 끝도 없다. 이를 생사와 연관시켜 보면, 나이 들어 생사 법문을 들을때 빨리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가면 오는 이치가 있고 오면 가는 이치가 있음을 깨달으라는 뜻으로 받아 드려야 한다. 이 거래하는 이치를 깨닫게 되면 해탈에만 그치지 않고, 내가 죽어서 잘 오고, 성불하여 제중하겠다는 원력(願力)을 굳게 세우는 목적 있는 영가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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