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자의 삶

▲ 정도성 도무/원경고등학교 교장
원불교 도무로 출가해 살아온 지 15년이 됐다. 나름 치열하게 살아왔고, 부침도 많았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들은 도무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원불교 교헌에 전무출신 품과를 교무, 도무, 덕무로 구분해서 명시하고 있지만 교무조차도 도무의 존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재가인 원무와 정무까지 있으니 뭐가 뭔지 혼동될 법도 하다.

대개의 재가 출신 도무들은 출가해 수행 봉공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교단의 후미진 곳에서도 이 공부와 이 사업을 감당하며 교화를 조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 자체가 곧 모든 도무들의 보람이 아닐까.

하지만 한 편으로 안타까운 것은 우리 교단 내부의 정서가 교무 이외의 품과나 재가 교역자의 존재를 크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게다가 교무로 출가했다가 교단이나 개인의 필요에 따라 품과를 전환한 도무들의 자긍심과 만족도가 매우 낮은 것을 보면, 도무나 덕무는 교무를 보조하는 품과 쯤으로 여기거나 '교무가 못되면 도무'라는 차선의 품과로 인식되는 면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지난번에 정책연구소(당시 소장 최정풍 교무)에서 전무출신 품과 제도 개선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호칭을 교무로 통일하자는 제안을 한 것으로 아는데 아직 그 제안이 채택되지 못하고 있다. 시기가 이른 것일까. 도무를 교무라고 부르고, 덕무를 교무라고 부르는 것은 아직도 먼 일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출가를 교단에서 허용하지 않았다면 또 모르되, 일단 출가를 허락하고 시방일가의 큰 집에서 살게 했다면, 그의 출가 경로가 어찌 되었건, 출가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았고, 무엇을 했건 불문에 부쳐야 한다고 본다. 품과는 교화사업을 해나가는데 필요한 작은 구분일 뿐이다. 대종사의 교법을 보고 서원을 세운 모든 전무출신들을 출가라는 큰 물줄기에서 하나로 엮어야 한다. 마땅찮고 부족하면 출가를 허락하지 않으면 된다. 출가 후의 성취는 각자의 몫이다. 그래서 나는 하루 빨리 출가자 호칭을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결코 교화에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또 한 가지는 호칭은 통일하되 품과의 이동을 자유롭게 했으면 좋겠다. 일정한 검증 과정을 거치고 자격 요건을 갖추어 품과 수행에 지장이 없다면 그 원하는 바에 따라 이동을 허락했으면 한다. 사람마다 다 특장이 있다. 처음 교무를 서원했지만 하다보면 맞지 않거나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교화에 무슨 열정이 생기겠는가. 도무나 덕무를 서원해 전문직이나 봉공직을 수행하다가 교화직이 적성에 맞아 또 다른 서원이 생긴다면 품과를 바꾸어서 각자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긍심을 가지고 살며 자긍심이 없으면 자신을 제대로 발현하지 못한다. 출가자의 자긍심은 대종사의 교법이지만 아울러 교단과 구성원들이 깊은 공동체적인 연대로 이어져 있지 않으면 자연 소외가 발생하고, 이는 교단의 손실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대종사께선 여성들을 진정한 의미로써 해방시키셨다. 여성 해방은 인간 해방이었다. 대종사께선 또한 이 세상을 수직적 서열 구조에서 수평적 관계 구조로 전환시키셨다. 모든 차별을 해소하고 오직 지우차별만 남겨놓으셨다. 더 좋은 세상은 그 가운데 있음을 믿는다.

나는 우리 교단이 잡철마저도 크게 녹여내는 용광로가 됐으면 좋겠다. 우리 교단이 가는 물줄기도 사양하지 않는 대해장강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도 그 안에서 녹고 흘러 세상을 받쳐주는 철주의 한 귀퉁이가 되고, 세상을 적셔주는 한 작은 물줄기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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