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와 배제 차별과 혐오가 일어나는
바로 그 현장에도 고통과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도 하느님이 깃들어

▲ 민김 종훈(자캐오)/성공회 길찾는교회, 용산 해방촌 나눔의집

나는 한때 가벼운 등산에 푹 빠졌던 때가 있었다. 사시사철 달라지는 풍경 속에서 동네 뒷산 산책로를 걷고 오르내리는 일은 일상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생각을 바꿔, 등산을 즐기는 사람들과 함께 산 하나를 넘는 일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이제 산을 제대로 넘는 등산을 하려고 하니 이전까지는 몰랐던 준비해야 할 것들이 생겨났다. 이제까지 동네 뒷산에 있는 산책로, 즉 모든 것이 정해진 길에서는 필요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새롭게 준비해야 할 것은 바로 '좌표를 보는 도구'와 '그 길을 잘 걷도록 돕는 도구'였다.

우리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길로만 다니는 일상에서는 무언가를 따로 준비하거나 가져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곤 한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큰 길을 걸어갈 때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좌표'를 제시해주는 도구가 필요하고, 더불어 잘 걷도록 돕는 '도구'가 필요하다.

내가 속한 그리스도교, 그 중에서도 성공회 신자이자 사제로 살아가는 데에도 역시 두 가지 도구가 필요하다. 그 중 좌표를 보여주는 도구는 '종교적 가르침과 그로 인한 지향,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근본 정신'이나 '그 종교를 관통하는 원리'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뭐라 부르든, 성공회 신자이자 사제로 살아가는데 있어 좌표를 보여주는 도구 가운데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만물 안에 깃드신 하느님'이다. 만물 안에 깃드신 하느님.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느님이 깃든 존재들이다. 우리 한 명 한 명이 전부 하느님의 숨결을 품은 존재이고, 하느님의 심장을 품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종교적 가르침과 이에 바탕한 지향과 태도를 얻게 되면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무엇보다 삶의 지향과 태도에 확연하게 변화가 일어난다.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마주할 때에도 많은 것들이 달라진 위에 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노인이든 젊은이든, 남자든 여자든, 가진 자든 못 가진 자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국적이나 인종, 피부색에 상관없이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만물 안에 깃드신 하느님'이라는 좌표를 받아든 순간부터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 일상에서 너무나도 쉽게 일어나는 소외나 배제 그리고 차별과 혐오의 문제를 대할 때에도 이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있을 수가 없다. 나와 상관없는 듯이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소외와 배제, 차별과 혐오가 일어나는 그 현장, 바로 그곳에서 고통과 아픔을 겪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하느님이 깃들어 계시기 때문이다. 혹여 나보다 지위가 낮거나 권력이 적다고 함부로 대하던 그 사람들, 알고보면 그들 모두에게도 나에게 깃들어 계신 하느님이 동일하게 깃들어 계시기 때문이다.

다양한 이유와 맥락에서 사회적 소수자로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나에게 깃들어 계신 하느님이 동일하게 깃들어 계신다. 그러므로 그들을 향한 배제와 차별 그리고 혐오와 폭력은 바로 우리 안에 깃드신 하느님을 향한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이 내가 '성공회 길찾는 교회'의 사제로, 성소수자를 포함한 사회적 소수자들을 향한 혐오나 배제와 맞서 싸우며 동행하는 이유다. 또한 다양한 맥락과 이유에서 '가난한 사람들'인 나의 이웃들과 함께 살기 위해 세워진 '성공회 용산 해방촌 나눔의집'의 사제로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만물 안에 깃드신 하느님이라는 좌표를 얻게 되면 나를 대하는 태도나 지금 당신 곁에 있는 당신보다 작고 연약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아니, 달라져야만 하며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당신을 그토록 소중하고 귀하게 만드는 당신에게 깃들어계신 하느님이, 지금 당신 곁에 있는 바로 그 사람에게도 깃들어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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