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산 순례길에 동행한 원문화해설단. 왼쪽부터 안도창·김성각·윤지승 교도.
▲ 개벽순례 남산길 코스.
소태산 대종사의 경성교화는 여성 제자들의 발굴이고, 인연불공의 모체이며, 제1 지방교화의 포석이었다. 불법연구회가 창립된 원기9년부터 익산본관을 중심으로 회상을 열었지만, 인적·물적·외교적 발판은 경성지부에서 다졌다. 이는 소태산 대종사가 원기28년까지 100여 차례 넘게 경성을 왕래하며 제자들에게 법설을 하고 사업을 권장했던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익산~경성 간 교통수단은 대부분 기차를 이용했다. 대종사는 경성역에서 밤기차를 타고 다음날 아침 익산역에 도착하는 차편도 다수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잦은 경성 왕래의 또 다른 이유는 시국을 관망하고 미래 세상을 전망해 시대적·미래지향적 교단을 이끌고자 한 성자의 의도로 읽힌다.

남산길 코스는 경성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남산 정상에 올라 소태산 대종사가 미래를 꿈꾸고, 시국을 관망했을 당시의 심정을 느껴보는 순례길이다. 서울역에서 출발해 서울성곽 길을 따라 호텔신라(옛 박문사 터)에 이르기까지 3시간여 동안 봄길을 걸으며 서울문화와 원(圓)문화의 접점을 찾아보는 시간이 됐다.

남산길 코스는 서울역~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빌딩~전재동포구호소 터~숭례문~남산공원~남산 야외수목원~남산예술원~장충단~호텔신라 순이다. 순례는 서울원문화해설단인 부평교당 김성각·반포교당 안도창·가락교당 윤지승 교도가 동행했다.
▲ 남산길을 걷다 보면 야외식물원 계곡물을 만난다.
소태산과 경성역 이야기

원문화해설단과 느지막한 3월 오전10시에 서울역(옛 경성역) 맞은 편 연세 세브란스 빌딩 앞에서 만났다. 각자 짊어진 가방에 5월1일 원불교100주년기념대회 홍보 배지를 달자 김성각 교도의 설명이 이어졌다.

연세 세브란스 빌딩은 원기20년 제4회 을해하선 때 경성지부 감원인 김삼매화가 입원해 수술을 받았던 곳이다. 소태산 대종사가 회원들과 함께 병원을 찾아 병문안을 했고 이후 김삼매화는 병이 회복됐다. 또한 이곳은 1919년 3·1 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인 곳이며, 송도성 교무가 서울역 근처에 전재동포구호소 터를 마련해 활동할 때 환자들을 수용하고 돌봐준 곳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재동포구호소 터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김 교도는 "경성역과 숭례문 사이 대로변 우측편에 태평여관이 있었다"며 "소태산 대종사가 원기9년 3월30일 최도화의 안내로 송규, 서중안, 전음광을 대동하고 첫 상경했을 때 묵었던 곳이다"고 설명했다.

경성역에 얽힌 소태산 대종사의 일화를 잠시 소개한다. 원기18년 경성출장소 돈암동 신축 공사가 이뤄지고 있을 때다. 당시 오창건 선진이 공사 감역을 맡고 있었고, 이완철 선진은 창신동 경성교무로 근무하고 있었다. 하루는 대종사가 이완철을 불러 짐을 지고 경성역까지 가자고 명했다. 이에 난색을 표한 이완철은 "교무의 위신상 난처하다"며 거절했다. 대종사는 다시 오창건에게 짐을 지어 다녀온 뒤, 이완철의 잘못을 엄중히 경책했다. 이 예화가 〈대종경〉 교단품 11장에 수록됐다.

소태산은 원기15년 5월28일 금강산을 갈 때도 경성역에서 경원선 열차를 타고 철원역에 내려 그곳에서 금강산행 열차를 탔을 것이다. 금강산 관람 후 6월5일 귀경했다.

한양도성 한눈에 내다보이는 남산공원

이어 순례단은 숭례문을 거쳐 남산공원 입구로 향했다. 남산길 코스의 매력은 사계절 어느 때든지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옛 성곽길이 잘 조성돼 대종사가 걸었을 당시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다. 순례단과 함께 성곽 길을 따라 남산 정상에 오르니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다보였다. 대종사도 당시 이곳에 올라 경성 시내를 내다보며 교단미래를 설계했을 법도 하다.

서문성 교무가 밝힌 〈대종경〉 전망품 10~11장에 나온 남산에 관한 대종사 일화다.

원기14년 11월 어느 날 소태산 대종사는 혼자 남산을 올랐다. 경성 회원들과 조선박람회가 열리는 경복궁을 다녀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경성 시내를 보며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을 때 청년 두 사람이 대종사를 발견했다. 이들은 당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보천교를 박멸하러 전라도 정읍에 내려가야 한다고 성토했다. 이에 대종사는 "지금은 묵은 세상을 새 세상으로 건설해야 할 시기인 바, 각색 교회가 사방에서 일어나 모든 사람의 잠을 깨우며 마음을 일으키니, (중략) 세상 모든 일의 허실과 시비를 알게 되매 결국 정당한 교회와 정당한 사람을 만나 정당한 사업을 이룰 것이니, 이는 곧 그러한 각색 교회가 몰이를 해 준 공덕이라"고 깨우쳐줬다. 그리고 며칠 후 익산 기사동선에서 조선박람회를 관람한 감상을 설법하니 〈대종경〉 천도품 6장, 전망품 27장의 근거가 됐다.

남산은 사대문 안에 위치해 있어 그 의미가 특별하다. 옛 도성의 정취를 그대로 담고 있으면서도 현대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이며 휴식처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때문에 윤지승 교도는 "남산길 코스는 서울의 역사와 유적지와 함께 대종사의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코스로 개발해야 한다"면서 "일반인이나 젊은층은 문화교화로 접근할 때 자연스럽게 교화로 이뤄진다"고 말했다.

남산에서 내려오면 야외식물원을 만난다. 흐르는 계곡물을 따라 걷다 보면 황정신행 종사가 희사한 한남동 수도원(옛 약초관음사)이 나온다. 현재는 임차를 주어 남산예술원으로 운영되고 있고, 입구에 '풍류로써 세상을 건지자'는 비석이 옛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대종사가 다녀간 곳은 아니다.
▲ 박문사가 자리한 장충단 터는 많이 소실돼 있었다.
장충단 박문사에서 법복·법락 구입

남산을 내려오면 장충단과 호텔신라를 만난다. 이곳은 소태산 대종사에게 아주 특별한 곳이다. 대종사는 원기25년 9월 교리에 뛰어난 이공주, 송도성, 서대원에게 〈종전(宗典)〉을 편성시키고, 이듬해 1월28일에 대중에게 게송을 설하며 제자들에게 '금강산으로 수양을 갈란다' 등 열반을 암시했다. 그즈음 상경해 장충단에 있는 사찰 박문사(현 호텔신라 터)에 가서 불교 종단의 법복 몇 벌과 법락을 사서 세탁부에 줬다. 이를 참조해 만든 법복을 2년에 걸쳐 제자들에게 나누니 200여 벌이 됐다. 안타깝게도 이 법복은 원기28년 소태산 대종사 열반식장에서 상복으로 쓰였다.

대종사가 열반 전 마지막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불교정전〉의 편찬은 일제의 탄압으로 인쇄허가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이때(원기27년) 박문사 상야 주지가 총부를 방문해 〈불교정전〉을 검열한 후 출판허가를 냈다. 덕분에 대종사가 열반 전, 가제본된 〈불교정전〉을 밤새워 친감한 후 1000부를 인쇄케 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원기28년 4월부터 장남 박광전을 박문사에 보내 불교의식을 배우게 했다. 그리고 6월1일 53세로 열반했다.

남산길 코스는 소태산 대종사가 서둘러 교단 인연을 모으고 경성지부를 안정시키고자 한 뜻을 읽어야 한다. 남산에 올라 빠르게 변화해가는 경성시내를 내려다보며 '급한 걸음'을 쳤을 교조의 당시 심경이 봄바람을 타고 전해져왔다.

교단이 원불교100주년기념대회를 맞아 소태산 대종사의 경성교화 발자취를 따라 걷는 개벽순례 코스를 개발하고 이를 안내할 '서울원문화해설단'을 양성했다.
본지는 4월 한 달간 해설단과 함께 순례길을 걸으며 이를 소개한다. 지상에서 만나본 소태산 대종사의 경성교화 발자취로 교단 2세기 서울교화를 다시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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