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자의 삶

▲ 김태인 원무/어양교당
낡은 앨범 속에서 발견한 한 장의 가족사진이 여러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이 사진은 총부 법무실 뜰 앞에서 대산 종법사를 모시고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이 날은 대산종사께서 클 태(泰) 어질 인(仁)이라는 직접 내려주신 법명과 모태중에서 원불교 신앙을 시작하게 된 첫 날이다.

우리 집안은 친척으로 11분이나 교무님이 계신다. 그래서 그 분들은 우리 집을 방문할 때마다 어린 나를 귀여워 하면서 '나중에 전무출신 하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면 예쁨을 더 받기 위해 "네! 전북출신 할께요"하고 발음도 틀리게 대답하며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조금 더 자란 뒤, 원친 학생회 활동을 통해서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을 알게 됐고, 기본교리에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고3때 교무님은 교학과를 권유하셨는데 지원을 생각해 보겠다고 하면서 교무가 될 오빠들이 생각났다. 3남매가 모두 전무출신을 하면 뒤에 남아계실 부모님이 걱정됐다. 또 내 자신도 많이 부족한 것 같아 서원을 세울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서원을 뒤로 미룬 채 교사가 되고 결혼도하여 바쁜 삶을 살게 됐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40세가 넘게 됐을 때 이사를 해서 어양교당으로 교당을 옮기게 됐다. 어양교당에서 중앙을 맡게 되고 여성회 활동의 한 부문으로 어린이 법회를 문화법회로 한 달에 한번 맡아 보면서 '교화활동이 참 어렵구나!'하는 것을 실감했다. 그러던 중 문화로 교화를 해보고자 하는 포부가 생기기 시작했다.

교당에 법회만 보던 나에게 두 번의 큰 공부의 기회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법회에서 경강을 하게 되면서다. '아만심을 내지 말며'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기 위해 <원불교교전>정독과 사례를 찾아 공부한 자료를 교도들에게 발표했다. 교도들은 '경강내용이 많은 도움이 됐다'고 기쁘게 인사를 해주니 '이런 기분에 교무님들이 설교를 준비하시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매주 설교를 준비하는 교무님들의 노고를 알게 됐다.

두 번째는 대적공실 의두 주제 6조인 '대지허공심소현(大地虛空心所現) 시방제불수중주(十方諸佛手中珠) 두두물물개무애(頭頭物物皆無碍) 법계모단자재유(法界毛端自在遊)'를 발표한 일이다. 이번에는 교무님과 문답감정을 통해 알게 된 것과 법문 말씀을 인용하고 여기서 깨닫게 된 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4정진 운동을 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속깊은 마음공부를 할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였고, 그 재미에 푹 빠지게 됐다. 발표는 부담스러웠지만 교도들에게는 이런 사례담이나 공부담이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더불어 알게 됐다.

어느 날 교무님께서 전화하셔서 원무로 추천해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에게는 아주 어렸을 때 '전북출신 하겠다'고 아무것도 모른 체 했던 첫 번째 약속, 대입 전 했던 두 번째 약속들이 늘 마음의 빚으로 있어 왔던 터였다. 그런데 지금 세 번째 서원의 기회가 왔는데 난 아직도 너무도 부족하다는 생각에 망설여졌다. '자신이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지금처럼만 해주면 좋겠다.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뜻깊은 원기100년에 원무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간곡한 말씀에 부족하지만 나는 용기를 냈고, 어린이 교화와 문화를 주된 활동으로 할 것을 다짐하면서 원무에 지원했다.

모태신앙으로 원불교를 만나서 세번만에 약속을 지키게 된 것이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원기100년 안에 서원을 세워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기뻤다. 하지만 한편으로 교화자로서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때면 어깨가 무거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럴때마다 하루 시작하는 기도로 다시 용기를 얻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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