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삶 통해 19세기 발흥된 후천개벽 그리다"

▲ 김형수 작가는 소태산은 깨달음을 언어로가 아니라 삶으로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글이 잘 드러날지 걱정했다.
페이스북 '원불교노마드개성교당'에서 〈소태산 평전〉을 연재하고 있는 김형수 작가를 익산유스호스텔에서 만났다. 평전 마무리 집필 장소이기도 했던 그의 방 침대 위는 많은 자료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단순한 장면 같지만 그간의 힘들었던 시간들을 찰나처럼 대변하는 듯했다. 〈소태산 평전〉은 5월 하순 '문학동네'에서 출판 예정이다. 그를 만나 작품 구상에서부터 탈고 이후 생각들을 들어봤다.

- 〈소태산 평전〉을 쓰게 된 계기는

소설가 정도상이 권했다. "〈소태산 평전〉을 써보면 어때?" 나는 1초도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어려운 건 못 써"라고 말했다. 종교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특히 불교 쪽이 어려워서 '낱말' 하나를 만나도 정도상 씨에게 물었던지라 오래 생각할 사안이 아니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혁명은 현실 안으로의 도피요 신비주의는 현실 바깥으로의 도피이다"라는 말을 놓고 고민을 꽤 해오던 참이었다. 스물두 살 때 광주에서 5.18을 겪었으니, 개인사 못지않게 세상사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지내다 문득 1980년대 후반쯤인지 〈공동체문화〉라는 무크지에서 〈전봉준과 강증산〉의 노선비교를 읽은 기억이 떠올라 정도상 씨를 다시 찾아갔다. "왜 내게 〈소태산 평전〉을 권했어?" 여기에 "어울릴 것 같아서"라고 말하더라. 내가 고민하던 것이 수운과 증산과 소태산에 대응되는 일일 것 같으므로, 내가 공부하는데 도움말을 줄 사람이 있다면 써보겠다고 말했다. 내 고향이 불갑산 앞쪽이다. 산 너머에서 어떤 기인이 도통해서 많은 제자를 얻었다는 얘기를 어린 시절에 동네 어른에게서 들었다. 뿐 아니라 장터 끝에 있는 주막이 내가 태어난 집이고 벌판 건너편에 있는 첫 집이 원불교 문장교당이어서 날마다 종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소태산의 삶 때문에 발생된 소리들이 알게 모르게 적셔 와서 내 몸 안에 꽤 깊이 새겨져 있었다. 써보려고 덤비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 원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이 평전에 필요한 방대한 자료를 어떻게 접했는가. 자료수집 요령이 따로 있었는가

'인터넷 검색'이라는 요령을 나는 좀처럼 떠올리지 못한다. 한참 땀 흘려서 고생한 끝에 키보드를 두들기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했다. 내가 곧장 달려간 곳은 헌책방이었다. 책 더미를 뒤지다가 운 좋게도 박윤철 교수의 〈원불교적 세계관의 인식과 실천〉을 만났다. 나 같은 사람이 원불교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저서와 논문들이 풍요롭게 소개되어 있더라. 제목들만 네 페이지쯤을 적어서 동작구 흑석동 정인성 교무를 찾아갔다. 늘 친절히 도와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송도성, 손정윤, 박용덕, 송인걸, 서문성 교무 등의 저술을 차례로 읽고 나서 출판사를 찾아가 계약했다. 문학동네 사장이 원광대 출신이다.

내 이야기를 듣더니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의 조언을 반드시 들어달라고 요청해서, 황송스레 면담신청을 했다. 소태산의 생애를 원불교 바깥에서, 독서 대중을 대상으로, 또 풍속사적 상상력을 바탕 삼아 써보고 싶다고 했더니 좋은 예감이 든다고 크게 격려해줬다. 이후 우연히 박용덕 교무의 카페인 '가마솥 공동체'를 알게 돼서 본격적인 자료를 만났다. 후천개벽에 대한, 불교에 대한, 소태산에 대한 저서와 논문 등을 꽤 읽은 셈이 됐는데, 박용덕 교무의〈초기 교단사〉만큼 큰 영향을 준 자료는 없었다. 그러고도 〈선진열전〉 〈구도역정기〉 같은 중요한 책들을 내내 못 구하다가 집필이 끝날 무렵에야 구하게 돼 발을 동동 굴렀다.

- 〈소태산 평전〉은 어떤 작품인가

내 글이 내게 보이겠는가. 〈원불교신문〉이 아니었으면 이 자리에서 소태산의 물음에 정산의 답변을 인용했을지 모른다. 그냥 독서 대중을 향해 말한다면 나는 소태산의 삶을 통해 19세기 조선에서 발흥된 후천개벽사상의 역사를 그려보고 싶었다. 불교의 미륵사상, 기독교의 종말론 사상에 비견되는 거대 토착사상에 대한 상상력이, 이즈막에는 문학작품에서조차 심한 단절의 국면을 맞고 있어서, 이래선 안 되겠다, 나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생각했다. 형식상으로는 인물론과 소설이 결합된 형태라고 보면 될 것 같다.

- 작가적 상상력과 영감은 어디서 받나

소태산의 시가 결정적이었다. 내게는 그 어떤 증언보다도 시에서 얻은 울림이 더 컸다. 나를 감동시킨 시를 소개해 본다. 대각 후 며칠 뒤 소태산이 의형 김성섭(법명 광선)과 밀밭에서 일을 하다가 '호남공중하처운 천하강산제일루(湖南空中何處云 天下江山第一樓)'라고 외운다. 동학혁명의 발상지요 수많은 농민이 학살된 호남은 지옥의 바깥이라고 할 땅이 한 뼘도 없을 만큼 무서운 아비규환의 땅이었다.

그곳에 서서 한다는 말이 호남의 허공 어디에 있어도 천하강산이 한눈에 보이는 제일의 누각이 아닐 수 없다고 외쳤던 거다. 가장 소외된 곳, 가장 억울한 곳, 가장 슬픈 곳에서 내려다보면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치가 한눈에 보인다. 이 엄청난 발언을 듣고 나는 정약용의 말을 생각했다. 한 역관이 중국에 가면서 세상의 복판을 구경하게 됐다고 들떠 있을 때, 중화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세상의 중심이지, 날마다 해는 내 머리 위로 떠올라서 정오가 되면 내 이마를 비친다, 했었다.

구간도실을 지을 때 쓴 '상량시'는 미학적 완성도로 보아도 굉장히 놀라운 수준을 보여준다. 천 개의 봄볕을 모아서 소나무가 서 있고, 천 개의 봉우리에 떨어진 빗방울이 내를 이루어 흐르고 있다. 어디에 중심이 있고 어디에 주변이 있는가. 엘리트주의가 얼마나 한심한 것인지 통렬히 부끄러워 할 풍경화 하나를 이리도 장엄하게 펼쳐낸 시를 나는 아직 못 봤다. 아마도 훗날 들뢰즈가 출현해서 '천 개의 고원' 같은 이야기들을 했는데, 그 옛날 전라도 골짜기에서 이런 사유가 펼쳐졌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 이번 작품에서 소태산 대종사의 어떤 면을 드러내고 싶었는가

종교적 인식이 중시하는 것은 무엇이 선(善)인가 하는 거다. 종교인들에게는 진리가 중요하다. 그러나 예술은 매혹에 집착한다. 예술이 세계를 극복하는 방식은 온갖 불미스러운 것들을 '추문'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소태산은 세상에서 버려져야 하는 것, 못 쓰는 것, 소외되어야 마땅한 것은 없다는 사상을 '언어'로가 아니라 '삶'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내 글에서 그게 잘 드러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사상을 말로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발바닥으로 썼으니까.

- 작품 탈옥 이후 인간 '소태산 대종사'는 어떤 분인가.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어떻게 단답형으로 답하겠는가. 그렇게 못할 것 같으니까 평전을 쓴 것이다. 단행본 한 권으로 답했다고 생각해주면 고맙겠다.

- 작품 중 가장 어려웠던 장면이 있었다면

조선시대 화가들에게 "귀신은 그리기 쉽다. 본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하는 화론이 있다. 소태산 같은 성자의 삶은 숱한 사람들에게 실체를 확인시켰기 때문에 그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문학적 글쓰기를 하는 사람은 서술과 묘사와 대사를 동원하는데, 그게 실제와 일체감을 주기가 난감할 때가 많다. 가령, '언어도단의 입정처'라는 표현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표현이다. 나는 처음에, 수운의 인내천, 증산의 해원상생에 비추어 소태산의 '은(恩)' 사상은 어떻게 설명돼야 하는지 속수무책이었다.

여기에 동원된 낱말들은 모두 국어사전 식으로 해석하면 '계몽주의적 오류'를 빚기가 십상이다. 내가 자료에서 만난 언어들 중에는 내 머릿속에 그려진 소태산이라는 캐릭터와 불일치되는 경우도 많았다. 나이 든 제자들에게 일상 언어에서 명령 투의 대화체를 하고 있으면 문학적 글쓰기에서는 '세상을 섬기는 자세'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또한 정황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는 '근대주의' 냄새를 머금고 있는 문장들도 많아서 나는 그런 것을 다른 글자로 표현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이게 지나친 각색일까 싶을 때가 종종 있었는데, 나중에 김도공 교수의 논문 〈원불교 교의해석의 근대성 극복 문제(1)〉를 읽고, '아, 내가 억지 해석을 한 건 아니구나'하고 다소 안심을 했다.


김형수 작가는
1985년 <민중시 2>에 시인으로 등단한 후 부정기 문예지 <녹두꽃>을 창간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1996년 계간 <문학동네>에 소설로 등단했으며, 시집 <빗방울에 대한 추억>을 비롯해 소설 <이발소에 두고 온 시>, 평론집 <흩어진 중심> 등을 펴냈다.
또한 <문익환 평전>, 시인 고은과의 대화 <두 세기의 달빛> 등 다수의 작품이 있으며, 현재는 원불교노마드개성교당 교도로 신동엽문학관 상임이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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