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택 원로교무
금강경 30분은 일합이상분(一合離相分)으로 '모이나 흩어지나 한 모습이란 뜻'으로 〈금강경〉 전체의 내용을 담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합한다는 것과 떠난다는 뜻으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는 이합집산이란 단어를 쓴다. 이합집산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일의 목적에 따라 모였다가 일이 끝나면 흩어지는 것처럼 인간 삶의 모습뿐만 아니라 우주의 변화하는 모습도 이합집산의 연속인 것이다.

須菩提야 若善男子善女人이 以三千大千世界로 碎爲微塵하면 於意云何오 是微塵衆이 寧爲多不아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녀인이 삼천 대천 세계를 부숴 티끌로 만든다면 네 뜻에 어떠하냐? 그 티끌들이 많겠느냐? 많지 않겠느냐?"

합리(合離)는 기(氣)의 이합집산(離合集散)으로 이를 다른 말로 '취산(聚散)'이란 말로도 사용한다. 합(合)은 '모은다' '합한다'는 뜻이다. 일원상 진리는 기(氣)의 덩어리로 기를 모은다는 것은 기취(氣聚)를 말하는 것이며 마음공부를 한다는 것은 기를 모으는 것이다. 기를 모으기 위해서는 기를 흩어버리면 안 된다.

정시(定時)에 기를 모으기 위해서는 부유난상(浮遊亂想)을 제거해야 한다. 사람이 생각을 한다는 것은 기가 따라 흐른다는 것이며, 그 기를 따라가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따라서 정시(定時)에 기를 모으기 위해서는 생각을 멈춰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며 일정 정도의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잠을 자는 것도 기를 모으는 하나의 방법으로 육신이 수면을 통해 쉬고 나면 기가 모아져 육근 작용이 활발하게 되기 때문이다. 동시(動時)에 기를 모으는 방법은 일심(一心)이다.

우리가 마음을 쓰되 일심집중하면 기가 빠지지 않고 모아 진다. 기가 충만해야 건강한 사람으로 육근 동작이 원할하게 움직일 수 있다. 기가 부족하거나 약하면 육근의 기능이 약화되어 많은 불편함을 초래하고 나아가 건강에도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보통사람 범부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기를 흩어지게 생활을 많이 한다. 그래서 기를 모으는 마음공부가 필요한 것이며 우리는 동시가 되든지 정시가 되든지 기를 뭉쳐야 한다.

대산종사는 〈대산종사법어〉 교리편에서 "정신수양은 마음을 닦아서 맑히자는 것으로 정신의 자주력을 얻자는 것이요 번뇌에 불타는 마음의 불을 끄자는 것이요 욕심에 도둑맞은 참 마음을 찾아내자는 것이며, 사리연구는 마음을 찾아서 밝히자는 것으로 모든 진리를 궁구하여 깨치자는 것이요 모르는 진리를 배워서 알자는 것이요 밝혀 놓은 참 지혜를 계속해서 닦아 어둡지 않게 하자는 것이며, 작업취사는 마음을 바르게 잘 쓰자는 것으로 악업을 끊고 선업을 행하자는 것이요 복을 계속해서 새로 짓자는 것이요 지은 복이 계속되도록 하자는 것이니라"고 했다.

동정간에 항상 함축하고 올바르게 취사 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으로 무문관(無門觀) 존야기(存夜氣) 성리대전(性理大全) 육근문 개폐 규제 자유(六根門 開閉 規制 自由) 동중정 정중동(動中靜 靜中動) 악고명심(握固冥心) 보림함축 묵언안식(保任含蓄 默言安息) 긴찰곡도 요골수립(緊紮穀道 腰骨竪立) 등을 말씀하셨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기를 함부로 쓰고 흩어버리는 사람이다. 마음공부란 기를 잘 함축하고 잘 흐르도록 올바르게 쓰는 사람이다.

〈금강경〉 30분 일합이상분(一合離相分)의 전반분은 합(合)의 세계에 대한 설명이다. 쇄위미진(碎爲微塵)의 이전의 합(合)은 거식적 세계를 말하고 후의 이(離)는 미시적 세계를 말한다. 불교는 합(合)의 세계를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합(合)의 세계는 우리가 보통 인식하는 세계를 구성하는 것으로 집, 책상, 나무, 사람, 자동차 등 모두 거시적인 세계로 뭉쳐져 이루어진 것으로 언젠가는 변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삼법인 중의 하나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이 있다. 우주 만물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아니하다는 것으로 무상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멸하며 시간적 지속성이 없음을 말한다. 반대로 기독교는 미시적 세계를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예수가 죽었다 살아났다'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러한 것을 우리는 정당한 판단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러한 인식론적 모든 분석 거부하고 오직 믿으라고만 한다.

중세시대를 우리는 보통 문화의 암흑기라고 하며, 보통 1050년~1300년을 중심으로 하는 전후의 시기를 지칭하고 넓게는 500년~1500년을 아우르는 약 1000년 동안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는 신학의 활성화로 인식론을 전재로 하는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독교 사고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사람이 대표적으로 부루노와 갈릴레오이다. 부루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감명을 받아 지동설로 가톨릭의 종교재판을 받고 7년간 투옥되었다가 마지막에 이단자로 몰려 1600년에 화형을 당한다.

마틴 루터는 "이 바보(코페르니쿠스) 같은 놈이 천문학 전체를 뒤집어 엎으려고 하고 있으나 성경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여호수아가 정지하라고 명한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다"라 했고, 죤 칼빈은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도다"(시93:1) 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누가 코페르니쿠스의 권위를 성경이상으로 올려놓을 자가 있는가?"라고 했듯이 철저하게 인식론적인 사유를 거부하고 있다.

그 외에 데카르트 뉴턴에 이어 순수이성비판을 주장한 칸트와 '신은 죽었다'는 니체 등이 있다. 이렇게 철학과 과학자들은 인식론적인 미시적 세계로 파고들어가 과학이 점차 발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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