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보육원 앞에 세워진 팔타원 황정신행 종사 흉상.
한국보육원으로 향하는 대종사 순례길의 근거는 <황온순 천성을 받들어 90년>에 팔타원 황정신행 종사의 기록으로 전해진다.

원기23년 대종사가 경기도 양주 송추(지금의 한국보육원)에 있는 황정신행의 별장에 다녀왔다. 당시 <회보>와 예회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종사가 원기23년 음력 3월23일 상경하여 음력 4월7일 총부로 귀관했던 한 차례 상경이 기록되어 이때에 대종사가 송추에 다녀온 것으로 짐작된다. 황정신행은 대종사가 상경하여 불법연구회 회관에 있을 시 경성지부 교무 이완철 등 6인과 함께 자신의 별장인 양주 송추를 다녀간 것을 원기80년 3월23일 서울교당 일요법회 때 설법을 통해 밝혔다.

대종사의 행적을 찾아 '서울원문화해설단'의 부평교당 김성각 교도와 봉도수련원 소중각 교무 안내를 통해 대종사의 우이동 역사와 지금의 한국보육원 양주 송추별장 순례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김성각 교도는 "경기도 양주에 있는 한국보육원까지 대종사가 황정신행의 안내를 받아 내왕했던 길이 우이령이다. 우이령을 넘어가면 공릉천이 나오는데, 그 공릉천 냇길을 따라가면 지금의 한국보육원이 나온다. 당시 양주로 가는 길은 우이령을 넘어가는 길이다"고 안내했다. 대종사는 우이동에서 우이령을 넘어 공릉천 냇길을 따라 황정신행의 양주 별장을 다녀가게 된 것이다. 우이동 봉도수련원은 대종사가 돈암동 회관에서 새 부지를 찾아 나선 역사가 있는 곳이다.
▲ 개벽순례 우이령 코스.
대종사가 점지한 '봉도수련원'

봉도수련원이 위치한 우이동은 우이봉의 이름에서 유래됐는데 북한산 동쪽 기슭에 위치해 쇠귀같이 보인다 하여 우이봉(牛耳峯)이라 했다. 우이동에서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보면 왼쪽으로 북한산과 오른쪽 도봉산 사이에 산자락을 넘어가는 원만한 길 우이령이 있다. 그 앞쪽으로 계곡이 흘러내리며 산새의 기운이 뻗어내려 오는듯한 자리에 봉도수련원이 위치해 있다.

원기25년 10월경 일본 경찰이 대종사에게 일왕을 만나 충성서약을 하도록 종용했던 일이 있었다. 대종사는 그들의 뜻에 호응하듯 하며 미루다 부득이 일본을 가기 위해 부산에 내려가게 되었는데, 총독부에서 여권을 발급하여 주지 않고 갑자기 가지 않아도 된다 하여 익산총부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고 곧 상경하여 돈암동 경성지부회관으로 가게 됐고, 황정신행이 대종사를 찾아뵙게 되면서 봉도수련원의 역사가 시작됐다.

대종사가 상경하자 황정신행이 찾아오게 되고, 황정신행과 제자들이 대종사와 담화 도중 경성지부회관에 대한 이야기와 새 부지를 찾아보자는 의견이 나오게 되었다. 황정신행이 "지금 회관 장소가 너무 협소하니까, 장소가 넓고 경치가 좋은 곳에 설치하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의견을 내놓았다. 이에 대종사는 "백번 그러고 싶지만 교단 사정도 있고 가장 중요한 금전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나"고 말하자 황정신행은 "그러시면 한번 가서 보시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황정신행은 대종사와 박장식, 경성교무 이완철, 이동진화와 함께 산세가 좋아 별장지로 이름이 있던 우이리를 찾았다.

소중각 교무는 "황정신행은 우이령을 넘어 양주에 있는 산을 사기 위해 이 길을 다녔고, 송추에 별장이 있었기 때문에 이 곳 우이리를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하며 "대종사 일행이 우이리 땅을 알아보기 위해 두 세곳을 답사를 하던 중 마침 적당한 장소를 찾은 곳이 이곳 우이동 봉도수련원 터다"고 증언했다. 소 교무의 안내에 따르면 당시 대종사가 이곳을 보고 "이 땅이 전망도 좋다. 수도도량으로 자리잡기에 이만한 터도 드물겠다. 이 터는 장차 수도도량이 될 것이다"고 전망했다고 한다.
▲ 봉도수련원에서 한국보육원으로 가는 길. 우이령을 넘어가는 입구.
양주의 송추, 황정신행의 별장

우이리 계곡은 아름답기로 소문나 우이구곡으로 널리 알려지고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라 한다. 이곳에 의암 손병희가 살면서 수도하던 봉황각이 있다. 보국안민을 내세우고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찾기 위해 천도교 지도자를 훈련시킬 목적으로 세웠다고 전해진다. 우이리 계곡와 인근 수유리에는 최남선, 이시영, 이준열사 등의 묘소가 있고 우이동을 포함한 북한산 일대는 1983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도수련원에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가파르지 않은 원만한 능선이 나오는데 북한산과 도봉산 산자락이 만나는 우이령이다. 60년대말 북한공작원들이 북에서 넘어와 청와대를 향할 때 이곳을 지나왔던 적이 있었다. 그 뒤로 군사제한구역으로 통제되면서 민간인이 드나들 수 없었는데, 최근에 들어서야 우이령이 민간인들에게 개방되어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드나든다.

능선을 넘어 한참 걸어 내려가면 오봉의 밑으로 계곡이 흐른다. 그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공릉천을 만날 수 있는데, 이곳에 물길을 따라 가면 송추로 가게 된다.

황정신행이 대종사와 일행등을 안내하며 이 근방을 지나올 때의 예화가 있다. 황정신행은 박제봉이 음식 장만도 못하고 오는 것이 안되었다 생각하고 괜히 민망하여 솔잎을 뚝뚝 뜯으며 걸었다. 이를 본 대종사가 "다음에 그 과보를 받는 수가 있다"고 일렀다. 그 행동이 부끄럽고 땀도 많이 나서 황정신행은 개천가로 가 얼굴을 씻는데, 물을 퍼내 듯하며 얼굴을 씻었다고 한다. 대종사는 그 모습에 "그렇게 해서 되나. 이렇게 떠서 여기서 씻어야지"하며 물을 떠 돌아서 얼굴을 씻었다. "이 물이 이 아래로 흘러가서 논 부치는 사람들이며 모든 움직이는 것들도 이물을 먹고 사는데 아껴야지. 여기서 세수를 할 것이야"라고 가르쳤다. 훗날 황정신행은 그때 그 말씀을 잊어버릴 수가 없다고 회고했다.
▲ 경기도 양주에 있는 한국보육원. 팔타원 황정신행 종사가 자신의 별장터에 보육원을 세웠다.
한국보육원 설립배경

한국보육원은 이승만 대통령의 부탁으로 황정신행이 1951년 2월 제주도에 내려가 전재아동 900여명을 데리고 설립했다. 한국 역사 최초 고아원 설립이다. 1955년 제주도에서 서울 휘경동(현 휘경여중 자리)으로 이전했다가 1970년 양주 송추로 시설을 이전했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전란으로 잃은 어머니의 마음은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의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까. 아마도 황정신행이 한국보육원을 이끌었던 마음은 그것이었을 것이다.

한국보육원을 운영하면서 대종사가 자신에게 자주 했던 말을 떠올렸다고 한다. "공도에 헌신하는 사람을 친부모처럼 잘 섬겨라. 시골 농가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탁아소를 만들고, 일손바쁜 부모들을 도와서 농사일을 더 잘하게 해야 한다." 황정신행은 대종사가 다녀간 곳에 보육원을 마련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전했다.

100주년기념대회를 앞두고 국내외 재가출가 교도들을 위한 '서울원문화해설단' 준비가 한창이다. 개벽순례는 대종사와 초기 교단 선진들의 경성 교화 역사와 흔적을 담고 있으며, 기념대회 이후로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문화프로그램으로 거듭날 계획이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경성교화의 역사와 대종사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경성교화 순례길이 100주년의 의미있는 역사로 계속되기를 바란다.


교단이 원불교100주년기념대회를 맞아 소태산 대종사의 경성교화 발자취를 따라 걷는 개벽순례 코스를 개발하고 이를 안내할 '서울원문화해설단'을 양성했다.
본지는 4월 한 달간 해설단과 함께 순례길을 걸으며 이를 소개했다. 지상에서 만나본 소태산 대종사의 경성교화 발자취로 교단 2세기 서울교화를 다시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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