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빛내는 정전

▲ 김준영 교무/벤쿠버교당
사람들은 계산을 잘 합니다. 이해와 손익을 빠르게 계산해서 해롭거나 손해 보는 일은 안 하려 하죠.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선택의 결과가 늘 내 뜻과 같지는 않죠. 계산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이들은 지금도 이롭고 나중에도 이롭고 나도 이롭고 상대방도 이로운 길을 찾습니다. 어리석을수록 지금 당장 나에게 이로운 것을 우선시 하는 경향이 있죠. 그러다보니, 지금은 이로운 것 같으나 나중에는 해가 되고, 나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상대방에게는 손해가 되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그러다보니, 총량적으로는 이익이 되지도 않을 뿐더러 상대방의 원망이나 공격을 받는 등 괴로운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죠.

손익에 상관없이 인연 닿는대로 마음을 비우고 살지 못할 바에는 정말 총체적으로 계산을 잘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가 필요한 거죠.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유익한 길이 될까요?

훈련된 원불교인들은 어떤 상황을 분석하고 판단을 할 때 '대소유무와 시비이해'의 기준을 적용합니다. 전체적인 면과 부분적인 면, 변화될 상황 등을 함께 고려해서 옳고 이로운 것을 택하고 그르거나 해로운 것을 피하죠. 그런 측면에서 이로우면서도 옳고, 지금 이로우면서 나중에도 이로울 수 있는 것을 택하고 실천하는 것이 진정으로 계산을 잘하는 법이 됩니다.

하지만 손익을 계산하는 법이 그리 간단하지가 않죠. 그래서 우리는 깨달음과 지혜를 강조합니다. 뭘 제대로 알아야 손익을 정확히 계산해서 손해는 덜 보고 이로운 것을 선택하고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려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이치에 대한 깊은 이해를 깨달음 또는 지혜라고 하죠.

정말 세상의 모든 상황들을 보면 은생어해 해생어은으로 돌고 돕니다. 은혜에서 해가 생겨나기도 하고, 해에서 은혜가 나오기도 하죠. 위기가 기회가 되기도 하고, 행운이 오히려 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게다가 소소영령한 인과의 이치가 있어 아무리 얻고자 하여도 짓지 않은 것은 거둘 수가 없고, 아무리 피하려 해도 지은 것을 받지 않을 수가 없죠. 그러니 우리가 진정한 이로움을 구하고자 한다면 돌고 도는 인과의 이치에 따라 잘 심고 가꾸는 수밖에 없죠.

그래서 눈 밝은 성현들은 지금도 이롭고 나중에도 이롭고 나도 이롭고 다른 이들에게도 이로운 방법으로 공익실천을 말씀하셨습니다. 널리 대중에게 기쁨과 은혜를 실천하라는 것이죠. 대중에게 유익을 주고, 대중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을 공경하고 그에 맞는 대우를 하자는 것입니다. 형편되는 대로 널리 대중에게 정신·육신·물질로 기쁨을 나누고 은혜를 실천하는 거죠.

내 몸, 내 가정에 국한된 마음을 열어 만나는 인연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인류와 생명을 품에 안고 널리 대중에게 기쁨과 은혜를 실천하는 그 일이 사실은 오래 이롭고 모두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일시시로 대조하며 삶의 방식을 바꿔가도록 노력합니다.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