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도띠뱃놀이

끝없이 펼쳐진 서해바다, 풍랑을 벗 삼아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새벽을 여는 사람들. 섬에서 나고 자라 바다가 삶의 무대인 그들에게 인생의 온갖 시름과 고통, 만남과 이별은 파도소리만큼 거칠게 다가온다. 때문에 섬마을 사람들에게 원당신은 절대적 존재다. 해마다 행해지는 풍어제 또한 마을의 안녕과 만선의 뜻을 담아 섬마을 사람들에게 오랜 의지처가 되어왔다.

고슴도치(蝟)를 닮았다 해서 이름 붙여진 위도(蝟島)는 전북 부안군에서 가장 큰 섬으로 조기잡이의 칠산어장으로 유명하다. 한때 흑산도와 연평도와 함께 국내 3대 파시로도 잘 알려진 이곳에는 200년 넘게 이어져온 풍어제가 있다. 1985년 2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82-다호로 지정된 '위도띠뱃놀이'다. 위도에서도 가장 큰 마을인 대리마을에서 음력 정월 초사흘에 열리는 마을 굿이다.

위도 대리마을 사람들

제4회 부안마실축제가 열린 7일 부안읍내에는 '위도띠뱃놀이'(이하 띠뱃놀이) 재현 행사가 열렸다. 띠뱃놀이를 이끌기 위해 모처럼 부안 읍내를 찾은 대리마을 60여명의 주민들은 예년보다 2배 가까이 모인 군민과 관광객들로 인해 흥겨운 축제마당을 펼쳤다.

부안 격포항에서 위도까지는 배로 40여분, 바다를 사이로 이웃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축제를 위해 아침 일찍 섬을 나선 대리마을 사람들은 오후 1시 띠뱃놀이 재현행사를 위해 분주한 손놀림을 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직접 제작한 띠배라야 하기 때문이다.

마침 띠배에 앉힐 허수아비를 만들고 있던 김성덕 어르신(64)이 낯선 이에게 눈길을 주며 띠뱃놀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오늘은 내가 허세비(허수아비)를 맡았어. 어떠? 잘 생겼는가?" 힘 꽤나 쓸 것 같은 장성한 남자 몸에 얼굴은 해학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허수아비는 힘겨운 고깃배 일과 잠시나마 시름을 잊고자 하는 어부의 모습을 표현해 내고 있었다.

지금은 몸이 힘들어 어업은 하지 않는다는 그는 띠뱃놀이가 열리는 정월 초사흘이 되면 띠배 제작에 힘을 보탠다. "그날은 남자들이 아침 7시에 원당으로 올라가 재를 모셔. 그 시간 동안 바닷가에서는 띠배를 만들지. 오후에 원당에서 재를 모셨던 사람들이 내려오면 풍물패와 무녀가 이끄는 무당굿에 맞춰 마을 사람들이 고사도 지내고 다함께 어울려 춤도 추고 그러지. 2시간 정도 그렇게 신명나게 놀고 나면 마지막에 띠배를 바다에 띄우지."

설명을 하면서도 허수아비 만드는 손을 쉬지 않던 그는 "예전에는 띠로 배를 만들어 매끄롬했는데 이제는 그것도 귀해서 갈대짚으로 만들다 보니 거칠지?"하며 세월의 흔적을 내비친다. 그러면서 한탄스런 말을 꺼낸다. "배 만드는 일이 쉬운 것 같지? 힘들어. 옛날처럼 젊은 사람들이 없어서 더 그러제. 늙은이들만 허니께. 그래도 어쩌. 하던 것인 게, 안 허면 안 되는 것인 줄 안게 허는 것이제."

1960년대만 해도 만선에 콧노래를 불렀던 대리마을 사람들은 예기지 못한 대형 풍랑과 서해훼리호 침몰 등 2차례의 큰 아픔을 겪으면서 3천명이 가까웠던 마을 사람들이 지금은 1천6백 명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자식을 키워 육지로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의 마음이야 오죽할까. 해마다 풍어제를 통해 수중고혼을 위로하는 일이 가슴에 품은 깊은 상처를 달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 제4회 부안마실축제가 열린 7일 부안읍내에는 '위도띠뱃놀이' 재현 행사로 군민과 관광객들의 관심을 모았다.
'어어화 술배야~' 사공의 노 젓는 소리

이날 띠뱃놀이 재현은 부안읍 아담사거리에서 터미널사거리까지 대리마을 사람들이 영기(令旗)를 들고 앞장서고, 군민과 관광객들이 오방기를 들고 뒤따랐다. 1시간 동안 이어진 행진을 뱃노래로 이끈 김상원 소리꾼(85·중요무형문화재 제82-다호 위도띠뱃놀이 예능보유자)은 목이 다 쇠도록 노구에도 선창을 이어갔다.

행진이 끝나고 잠시 목을 축이던 그는 마을 어른답게 쉴 새 없이 사람들을 챙긴다. 1978년 춘천에서 열린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위도띠뱃놀이(당시 명칭 '띠배보내기')가 대통령상을 받자, 이를 보존하기 위해 그는 원래 배움도 없는 소리에 뛰어들어 지금까지 뱃노래를 이끌고, 무녀 2명을 키우는 중이다.

그는 "당시 대리마을에 조금례 씨(중요무형문화재 제82-다호 위도띠뱃놀이 무녀 예능보유자)가 있었는데 문화재로 지정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어. 그때 살아생전에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내가 열심히 쫓아다니며 사설(굿하는 소리)을 배웠지"라고 회고했다.

이날 그는 가래질소리, 배치기소리, 술배소리를 선보였다. 가래질소리는 조기를 퍼서 담을 때 부르는 노래이며, 배치기소리는 조기잡이 배가 만선이 되어 돌아올 때 선원들이 부르는 노래이다.

마지막 술배소리는 이날 가장 많이 불렀던 곡으로 선원들이 노를 저으며 부르는 노래다. "어어화 술배야~" 하고 그가 선창을 하면 뒤이어 그와 소리꾼으로 한평생을 살아온 이종순 어르신(82·위도띠뱃놀이 예능보유자)이 소리를 받는다. 이종순 어르신은 10세 때부터 마을 어른들에게 띠뱃놀이 전 과정을 배우며 소리를 했으니 그 세월이 70년도 넘는다.

두 어른이 주거니 받거니 뱃노래를 이끌어 1시간 동안 행진을 마치고 나니, 풍물패들이 신명나는 가락으로 마지막 대동마당을 열었다. 행진을 함께한 군민과 관광객들은 마치 정월 초 사흘에 위도 앞바다에서 펼쳐진 뱃놀이처럼 신났다.

위도 띠뱃놀이보존회 장영수 회장은 "위도띠뱃놀이는 액을 띠배에 띄워 멀리 보내고 한 해 동안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살아있는 전통문화행사다. 선조들의 정신이 살아있는 전통문화로 남아 누구에게나 나눔과 화합의 장으로 다가갔으면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위도의 작은 동네에서 태어나 대리마을로 시집 간 후로 칠십평생을 바다에 기대어 살고 있다는 서진여 어르신(70)은 "이게 대통령상 받은 거여. 아주 자랑스럽제. 위도 진짜 좋아. 한번 와 봐" 하며 한바탕 춤에 빠져든다.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몸도 마음도 풍물패 가락에 맞춰 덩실덩실 흔들거린다. 고단한 삶에도 그러한 흥이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가. 떠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바다에 기대어 한평생 맡기고 사는 삶도 나쁘지 않을 터.

위태로운 삶이라 하여 어찌 신명이 없겠는가. 바다를 떠나지 못하는 대리마을 사람들은 오늘도 풍어를 기원하며 먼 바다로 배를 띄울 테다. 만선을 알리며 섬을 가득 채웠던 사공소리의 함성이 과거의 시간을 거슬러 그들에게 와 닿기를 염원하며 서해 칠산바다 어딘가에 두둥실 떠다닐 띠배를 그려본다.
▲ 중요무형문화재 제82-다호 위도띠뱃놀이 보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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