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생수

▲ 윤지승 교도/가락교당
어느 날 교당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아들에게 원불교를 알려주기 위해 질문했다.
"서울에 교당 말고 뭐가 있을까? 서울회관? 봉도수련원?" 했더니, 뜬금없이 "문화의식이 없었나보네. 아니면 핍박을 안 받았든지" 라고 답한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하자, 아들은 "아니, 종교 탄압 내지 핍박을 받았다면 벌써 중요한 유적지를 사들여서 가꾸고 했을 텐데 100년이나 된 종교가 수도 서울에 문화유적지가 없다는 게 말이나 돼? 타 종교에서처럼 순교자가 나왔어야 발전을 했겠지" 한다.

할 말을 잃고 있으니 아들이 또다시 말을 꺼낸다. "그럼, 대종사님이 (서울을) 수없이 다녀가셨다는데 발자취는 남아있어? 또, 맞나 보네. 문화의식 없는 거!"

아들의 말에 무슨 변명할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 아이들은 솔직한 거다. '원불교에 엄마를 빼앗겼어요'라고 아이들이 우스갯 소리를 할 정도로 열심히 활동했던 자신을 보며, 내 딴에는 '원불교가 참 대단하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아이들 질문에 도무지 무슨 말로 대답해 줘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렇다. 우리는 너무 했다. 대종사가 100번 넘게 다녀간 이 서울에 땅과 건물은 고사하고 표지석 조차 딴 곳에 있었지만, 그것도 모르고 성적지가 원래 그 자리인줄 잘못 알고 있었고, 되돌려 놓을 줄도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문화와 감성이 중요시 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과연 아이들과 젊은 세대들에게 무엇을 남겨 줄 수 있을까? 우리 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서울 성적지의 그 황량함에 무엇을 더 얹어 이 세대들을 이끌어 갈 수 있을까?

우리는 서울의 문화를 가꾸고 지켜나가는 데 소홀했었다. 돌아다보면 가져다 쓸 수 있는 게 지천이었는데도 우리는 너무 소홀했었다. 그렇다고 반드시 성적지에는 번듯한 건물을 지어야 하고 아름다운 조형물이 있어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성자가 수없이 다녀간 그 길을 따라 걷는 순례만으로도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기억하고 지켜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교전 속 관련 법문이 우리들 가슴속에 좀 더 살아 숨 쉬게 하는 문화를 발전시켜 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간 서울을 볼 줄 아는 눈이 없었다.

교당 문화는 15년 전 아이와 손잡고 교당에 나갔을 때나 지금이나 거의 변하지 않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변하지 않고 있는 교당의 문화를 좋다고 해야 할지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변한 게 없다는 건 거룩함과 전통성을 잘 지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입교도나 젊은 세대에겐 숨 막히는 공간, 혹은 설 자리가 없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이번 원문화 활동을 하면서 교화와 교육에 사용할 수 있는 너무 좋은 소재들이 많이 있었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태까지 그것을 활용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례길에 역사와 문화, 예술을 엮어서 어린이 교화를, 안식과 미래 비전으로 청소년 교화를, 친정엄마와 같은 포근함으로 젊은 층 교화를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많이 들었다.

향후 원불교 교화의 내력이 궁금하다면 창신길에 가보라. 대종사의 발자취가 곳곳에 묻어있고, 우리 선진들의 그 간난함과 혈성이 곳곳에 배어있다. 가슴 절절한 일화들과 살아 숨 쉬는 법문이 있고, 위대한 성자의 말씀을 직접 체득할 수 있는 백법(白法)이 흐르는 창신동은 또 어떤가. 왕궁가와 사대부만 살았던 북촌길. 이곳은 각 종교의 각축장이었고, 신교육의 밀집지대였다. 북촌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어떻게 돌아갔고, 대종사는 여기서 무엇을 했는지, 경성의 인연들은 무엇을 했으며, 우리의 법문은 어떻게 전해져 왔는가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남산길에는 우리가 가야할 미래의 길이 엿보인다. 그곳에는 시국을 관망하며 미래를 전망하던 대종사가 원불교 2세기 교운 융창의 큰 틀을 짜며, 우리 회상의 사회적 위치와 추구하는 바를 확실히 닦아준 대종사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다. 또 교화의 틀은 짰지만 일제의 탄압과 현실적인 여러 문제에 봉착한 성자의 인간적인 고뇌가 젖어있는 봉도청소년수련원과 우이령길, 이 모든 것이 원불교의 힘이고 저력의 현장이었다.

이제 모두 성적지에 관심을 갖고 과거와 미래의 소통과 배움의 창구로 활용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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