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의 마지막 부분으로 32분 응화비진분은 "모습으로 나타난 부처님은 참이 아니다"는 뜻이다. 응화(應和)란 응신(應身)과 화신(化身)을 말하는 것으로 모두 색신(色身)의 다른 이름이다. 모습으로 나타난 이전의 몸은 법신(法身)이며 참 모습이다.

須菩提야 若有人이 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로 持用布施라도 若有善男子善女人이 發菩薩心者- 持於此經호대 乃至四句偈等을 受持讀誦하며 爲人演說하면 其福이 勝彼하리니

"수보리야! 만일 어떠한 사람이 있어 수로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가져다 보시에 사용할지라도, 만일 선남자 선녀인이 보살의 마음을 발한 이가 있어서 이 경을 가지되 내지 사귀게 등을 수지 독송하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연설하다면 그 복이 저 칠보의 복을 뛰어 넘으리라."

아승기(阿僧祗)는 산스크리트 아상가(asanga)를 음역한 말로, 수리적으로는 10의 56승 또는 59승을 뜻한다. 갠지스강의 모래 수를 뜻하는 항하사(恒河沙)보다 더 많은 수를 이르는 말로 '셀 수 없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수는 일·십·백·천·만·억·조 정도이고, 조의 만배는 경(京), 경의 만배는 해(垓), 해의 만배는 자 (秭)이다. 자 다음으로 각각 만배씩 더하여 양(穰)·구(溝)·간(澗)·정(正)·재(載)·극(極)·항하사가 이어진다. 아승기는 항하사의 만배이며, 아승기 다음으로는 나유타(那由他)·불가사의(不可思議)·무량대수(無量大數)가 이어진다. 항하사부터는 불교에서 유래한 말이다.

'발보살심자(發菩薩心者)'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금강경〉은 대승경전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승 운동을 추구하는 구체적인 행동이 보살 운동이라 할 수 있고 부처님도 이 보살에 포함 시킨다.

반면에 소승의 최고 경지는 아라한이며, 부처님은 그 누구도 넘을 수 없는 최고의 경지에 있는 분으로 신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다.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소태산 대종사를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 도저히 따라 갈 수 없는 사람으로 신격화 시켜 소승으로 전락할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유념을 잘 해야 한다.

소태산 대종사에게 향하는 법맥(法脈) 신맥(信脈)이 정산종사로 대산종사로 좌산상사로 경산종법사로 이어져야 하고 그것이 보살 정신이다. 소태산 대종사에만 머무르면 안 되고 그것이 대종사의 정신도 아니니 아주 중요한 내용임을 명심해야 한다. 대산종사도 "대종사가 만고 일월(萬古日月)이시라면 정산 종사는 만고 신의(萬古信義)시니, 정산 종사는 대종사께서 어떤 일을 시킬지라도 한마음으로 받드셨고, 나 역시 대종사와 정산 종사를 내 생명과 같이 받들 뿐 단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느니라. 사람이 재주가 늘고 힘이 생기면 스승을 자기 잣대로 재고 사사로운 마음으로 대하기 쉬운지라 그러하면 법맥이 끊어지고 큰사람이 되기는 어려우니라"했듯이 보살 정신에서는 어느 한분만 국한 되어져서는 안 된다.

대종사가 살아생전에도 보살 정신을 철저하게 강조한 부분이 대종사 조실에 계시더니, 때마침 시찰단 일행이 와서 인사하고 여쭙기를 "귀교의 부처님은 어디에 봉안하였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우리 집 부처님은 방금 밖에 나가 있으니 보시려거든 잠간 기다리라." 일행이 말씀의 뜻을 알지 못하여 의아하게 여기더니, 조금 후 점심 때가 되매 산업부원 일동이 농구를 메고 들에서 돌아오거늘 대종사 그들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시기를 "저들이 다 우리 집 부처니라" 그 사람들이 더욱 그 뜻을 알지 못하니라.(〈대종경〉 성리품 29장)이라 할 수 있다.

고정된 불상에 집착한 시찰단의 의식 깨기 위한 방편이지만 교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부처로 보살로 바라보는 대종사의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대종사는 게송을 내릴 적에도 "옛 도인들은 대개 임종 당시에 바쁘게 전법 게송을 전하였으나 나는 미리 그대들에게 이를 전하여 주며, 또는 몇 사람에게만 비밀히 전하였으나 나는 이와 같이 여러 사람에게 고루 전하여 주노라. 그러나, 법을 오롯이 받고 못 받는 것은 그대들 각자의 공부에 있나니 각기 정진하여 후일에 유감이 없게 하라"고 하여 누구나 각자의 정진에 따라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대승정신을 일관 되게 보여 줬다.

보살은 모든 깨달은 자들이 포함된 광의의 개념이다. 이렇게 금강경 마지막 장에서 구마라집이 보리심이라고 하지 않고 보살심이라고 표현한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참고로 원불교 교전에는 '보리심(菩提心)'으로 나와 있고 해인사본에는 '보살심(菩薩心)'으로 되어있는데 대승 경전의 흐름으로 보아 보살심으로 해야 한다는(도올 김용옥) 논리를 수용하였다.


云何爲人演說고 不取於相하야 如如不動이니
"그러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연설한단 말인가? 상(相)을 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움직이지 말라."

'연설(演說)'이란 말은 불타의 가르침을 남에게 설한다는 의미로 쓰고 있으며, 연(演)하여 설한다는 뜻이다. 연이란, "물흐르는 대로 그 물가를 따라서 자세히"의 뜻이 있다.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그렇다면 어떻게 남을 위하여 이 가르침을 말하여 들려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말하여 들려줄려고 하지 말라! 그래야 비로소 말하여 들려준다고 말할 수 있다"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구마라집은 '불취어상(不取於相), 여여부동(如如不動)'이라고 표현 하였고, 금강경의 처음과 끝이 상(相)이 핵심사상으로 "상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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