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상도 제작에 '현림의 화풍' 창작 담아내
한국 전통성이 곧 세계화 될 수 있어
원불교 뿌리와 배경, 한국민족정서에서 찾아야
우리문화의 인식, 일제시대부터 왜곡된 것 많아

▲ 현림 정승섭(법명 도상) 화백이 그린 대종사 십상도 중 장항대각상. 왼쪽은 최근 작품, 오른쪽은 첫 작품이다.
지난 4월8일자 신문에 실린 본인의 십상도 문제제기를 읽고 제작자의 입장을 밝히는 바이다. 제작자는 35년 전 원광대학교에 부임하여 당시 교화부장이었던 좌산상사의 의뢰를 받아 처음 십상도를 제작했다.

그 당시에는 숭산총장님과 많은 어른들의 자문을 받아 작품제작에 몰두했으며 또한 신도안에서 제작할 때는 대산종사의 십상도 법문에 눈을 뜨게 됐다. 당시 "그림과 함께 수양에 힘써야 큰 도인도 되고 큰 그림도 나온다"고 일러준 스승님이 새삼 그립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처음의 십상도에 대한 부족함이 마음속에 자리하게 되어 30여년 동안 미해결의 과제로 고민했는데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로부터 다시 십상도 제작을 의뢰 받으니 더욱 큰 부담감과 사명감이 느껴졌다.

한국민족정서에서 찾는 원불교 문화

십상도를 두 번 제작하는 과정에 많은 분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오늘날 원불교 문화가 한국인 정서와 어떻게 교류하고 세계화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살아왔다. 원불교의 문화도 독자성과 일반성 그리고 대중성 또한 갖춰야 된다고 본다. 이러한 사실은 요즘의 한류 문화와도 맥을 같이한다고 생각한다.

지적한 장항대각상에 대종사님은 상투를 올려야 맞다고 본다. 그러나 처음 제작시 자문의 말씀에 따라 삭발한 모습으로 표현했기에 두 번째도 그렇게 했다. 상투의 이미지는 선천시대의 상징처럼 생각된다고들 했다. 모델은 대각한 8~9년 후 처음으로 삭발하고 촬영한 진영이라고 하여 초상화처럼 모사는 하지 않았다.

문제는 호랑이가 대각상에 등장한 구도가 샤머니즘의 산신도처럼 보여서 대종사님의 주세성자 위상을 손상시킨다는 지적이다.

산신도는 사찰의 산신각에 주로 모셔져 있고 무속인의 신당에서도 모신다. 이는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올 때 기존의 민중신앙과 접합하기 위해 사찰마다 산신각을 건립하여 우리민족 고유의 정서를 배척하지 않고 부처님에게 귀의하도록 포용했기에 민중으로부터 또한 불교가 쉽게 수용된 것이라 한다. 오늘날까지도 사찰에서 산신각 신앙이 주류 신앙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하늘엔 상제에게, 산에서는 산신에게, 물에서는 용왕에게 빌고 가정에서는 조상에게 빌어 고해의 삶에 대해 구원과 위로를 구하는 심성을 가졌다. 이 민중신앙의 기복하는 모습은 후래 종교들의 원래 모습과도 그다지 다르지 않으나 우리의 민간신앙은 독특하게 귀의처와 기복자 간에 중간자가 있어 말없는 귀의처와 쌍방 소통의 역할을 하면서 민중의 아픔을 보듬고 위로해 왔다. 그런데 일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우리 민간신앙을 사이비 또는 유사종교라 치부하고 탄압한 민족정기 말살정책 때문에 오늘날까지 그 인식이 일부 남아있어 민간신앙에 대한 차별을 표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각상에서 호랑이가 등장한다고하여 산신도와 같다함은 일방적인 주장이다. 민족정서의 싱징인 산신도의 구도차용은 있을 수 있으나 구체적인 화도나 화풍에 있어서는 산신도와는 전혀 차원이 다름은 두 작품을 직접 비교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내용 분석은 하지 않고 대각상에 호랑이가 있다는 이유로 산신도로 거론하는것은 부당한 주장이다. 간단하게 검색창에서 '산신도'를 찾아 비교해 보라. 과연 대각상에서 대종사를 산신으로 볼 대중이 얼마나 있으며 호랑이구도를 산신도와 같이 볼 것인가? 예술에서 구도나 이미지를 차용하는 예는 무척 많다. 당장 우리 역사박물관의 대종사 석조상은 불상문화를 그대로 옮긴 것이며 기독교의 성모자상 또한 종교를 넘나들며 수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호랑이는 호위존자

작가의 의도는 호랑이를 등장시켜 민중의 눈높이를 '우리들의 대종사님'에게 향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상징은 낙원세계로 인도해줄 새부처님 앞에 호랑이를 호위존자처럼 설정한 것이다. 대각상을 산신도의 이미지로만 보는 것은 외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처럼 밝지 못하고 원만하지 못하다. 호랑이는 민족정서의 상징으로서 주세성자가 민중과 함께한다는 희망을 주기 위한 구도인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 인식에는 신령한 호랑이가 존재한다고 믿지만 유독 특정 회화의 호랑이만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

맹호도, 호작도, 산신도, 신선도 등 호랑이는 민중의 삶에 깊숙히 들어와 있고 역사적으로도 설화나 동화 등 많은 이야기가 있어 대종사를 대중과 호흡하며 친숙하게 생각토록 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기독교나 불교의 성화나 탱화 등을 보면 그 민족의 역사나 신화 전설 등을 모티브로한 명작들이 많이 있다. 곧 민중들의 의식을 화폭에 담음으로써 성화가 민중들과 소통하고 생명력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대각의 세계를 중생의 눈과 정신으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처음의 십상도에서는 대각상을 원광으로 정적인 표현을 했지만 이번의 대각상은 세상 속에서 민중의 구원자로 대각한 대종사를 직접 표현했고 그러한 상황논리를 호랑이로 구체화했던 것이다. 주세성자와 호랑이는 삼령기원상에서 관계가 있다고 들었다. 호랑이는 입을 크게 벌려 표효하는 맹호도 모습을 상상하다가 성자의 대자비 앞에서 입다문 호랑이를 보니 큰 강아지처럼 순한 범으로 보이나 위엄은 갖추게 했다. 앞으로 수많은 작가가 십상도를 제작하면서 한국정서를 바탕으로 또는 글로벌한 상징을 창조해 발전해 갈 것이다.

십상도 여시아문

십상도는 이러저러해야 된다고 규정하면 처음의 십상도가 부합한다고 본다. 작가로서 처음 십상도는 구도상 많은 자문을 받았으나 회화적으로는 미숙함이 많았다. 그리하여 다시 제작하게 되니 나이도 늘었고 교법도 좀 이해하게 되어 그동안 연마한 '현림(玄林)의 화풍'을 살려 대표작으로 제작하고 싶었던 것이다. 평생을 우리 성화 작업에 매진해온 사람으로 큰 보람과 사명감을 가져왔는데 이러한 왜곡과 오해가 발생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이번 십상도는 교단이 의뢰했지만 현림의 예술작품이기도 함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전통적인 실경산수화에도 작가의 창작이 도입되며 사진처럼 묘사하지는 않는다. 부분적인 문제점을 지적할 수도 있겠으나 비유하자면 작가의 여시아문(如是我見)으로 봐주기를 희망한다. 십상도는 원래 큰 구도가 정해져 있기에 그 구도 안에서 많은 창작이 일어날 것이다. 큰 틀을 바꾸지 않는 한 작가의 자유스런 작품을 수용해야 원불교의 예술이 크고 다양하게 신장되리라 본다.

십상도는 교단의 공식 회화이고 교화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는 지적은 당연하다. 그러기 위해 노력했으나 미흡한 점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경험으로 보면 고증을 하여도 확실함은 보장하지 못했다. 꼭 그러기를 원한다면 처음의 십상도를 활용하고 이번 제작한 십상도에서는 그 '사실과 상상'의 차이를 예술로 이해하든지 아니면 문제의 대상으로 하든지는 역사가 정리해 줄 것이라 믿는다. 때문에 앞으로는 문제를 제기한다 해도 의미 없음으로 판단하겠다.

호랑이 등장의 문제라면 삼밭재에서 기도할 때, 호랑이가 옆에 와서 지켜줬다고 한 대종사의 말씀을 원용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다. 또한 26세에 대각을 이루기까지의 구도 역정은 호랑이 서식지에서 모두 이루었고 영물인 호랑이가 대종사의 구도와 대각과정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믿는다. 당시 영광 일우의 산림에 호랑이가 서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일제에 의해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성화의 창작성

그리고 과거 제작한 십상도를 영산성지에 전각을 지어 봉안하였으니 교단의 공식적인 정서이며 새 십상도는 그 연장선에서 완성도를 더욱 높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십상도가 교법에 맞지않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무책임한 매도가 공공연히 거론되는 현실에 그동안 평생토록 제작한 성화를 생각하며 몰이해에 괴로워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증을 위한 사전 모임은 없었고 과거에 십상도를 제작했던 그 화가에게 다시 제작을 의뢰하여 완성도를 더욱 높이라는 주문으로 받아들였다. 작가로서는 작품의 회화적 완성도를 추구하고 새로운 구도로 성화의 창작성을 도모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 방법이 '작가의 창의성을 살려'라는 논자의 대목을 불러와 세계적인 성화의 대열에서 원불교 성화가 한국에서 태어난 대종사의 생애를 담아야 하는데, 그 길은 한국의 전통성을 두루 갖춘 원불교의 독자성, 그러면서도 편벽되지않아 세계의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일반성, 보는 사람의 시각적 즐거움과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대중성을 고루 갖추는 길이라고 보며, 목표로 삼았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의 십상도는 현림이 본 십상도이기에 제작자도 문제를 충분히 인식한 계기가 되었으니 최소한 안밖의 여건이 주어진다면 보은의 심경으로 모든 역량을 경주해 필생의 각오로 공적인 고증을 받아 다시 제작하겠음을 교단에 제안하는 바이다.
▲ 정도상 교도/유성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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