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동안 교단의 창립역사를 지켜온 제명바위, 우리의 초심을 돌아볼 때 초창기 모습을 비춰주는 소중한 문화재다. 소태산 대종사는 대각 후 저축조합을 설립하고 그 자산으로 길룡리 해안 간석지를 막았다. 언을 막아 농토로 만드는 간척사업을 원기3년 4월에 착공, 원기4년 3월 2만6천여 평의 간척답을 준공했다. 별스런 장비없이 바다를 막고 나니 조합원들 가운데 한사람이 기념비를 세우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조합원 모두 동의는 했으나 비용이 없었다.

이때 칠산 유건종사가 옥녀봉 기슭의 바위를 가리키며 "저 바위에 양회(시멘트)를 바르고 거기에 제명을 해 두면 백 년은 갈 것 아니냐"고 제안해 채택됐다. 정관평이 내려다보이는 옥녀봉 중턱 3m여의 높이 자연석바위에 시멘트를 가로 90cm, 세로 45cm의 판처럼 바른 후 간척사업의 시(始)와 종(終), 설시원(設始員)의 제명(題名)을 팔산 김광선이 한문으로 오른쪽에서부터 세로글씨로 음각했다. 정관평 기념비인 일명 '제명바위'의 설시원 이름에는 조합장 외 8인을 새겼으나 8인은 법명이 나오기 전이라 호적명으로 새겼다.

이렇게 정관평 제명바위는 원불교 최초의 금석문이며, 가장 오래된 기록문으로 창립정신의 상징이다. 그런데 이 제명바위가 지금 오랜 풍파로 인해 부서져 내릴 위기에 처해 있다. 튼튼한 비석과는 달리 바위 위에 시멘트를 바른 것이라 수명이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를 걱정하여 원기75년 제명바위의 보존 문제를 놓고 의견을 모았다.

당시 유물사적위원회는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그 옆에 똑같이 본을 떠 모형을 세우자'는 의견이 모아져 현재 제명바위 옆에는 모형비가 하나 서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모형으로써 재현한 것이지 원형 그대로를 보존하는 해결방법은 아니었다. 지난해 11월 다시 제명바위 보존 의견이 제기됐다. 원형 그대로 보존이 가능한가에 대해 전문가의 의견을 구하기로 하고 대책을 논의하기로 했지만 아직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제명바위가 현실상 원형 그대로 보존이 가능하다면 그 의견을 따라 진행될 것이고, 만약 불가능 하다면 제명바위의 금석문 부분을 떼어내 따로 보존, 그 자리에 모조품을 재현하자는 의견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시일이 지날수록 제명바위는 점점 소실된다는 것이다. 제명바위는 우리 교단 초심의 상징이며 이소성대를 이룬 역사의 증거인 만큼 하루라도 속히 원형 그대로의 보존이 가능한지, 다른 대책을 찾아야 할지 신속한 판단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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