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자의 삶

▲ 강보광 덕무/중앙중도훈련원
나는 원평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성년기에는 군대를 다녀와서 전주에 머물렀는데, 고향에 명절 보내러 왔다가 우연한 계기로 원불교를 알게 됐다.

20대 후반이었던 당시에 나는 사업에 대한 비전과 욕심이 대단했다. 그래서 원평 소재지에 사업장을 차리면서 '적어도 10년은 사업에 전력하리라'하고 결심한 터였다.

그런데 친구 가운데 한 명이 원불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부탁이 있다고 했다. 무슨 부탁인가 했더니 대산종법사 명이라 하면서 원평교당 청운회에서 청년회를 결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원평교당에 청년은 본인밖에 없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마음없이 '청년회 결성을 할 수 있도록 청년들을 모아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내가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선후배 20여 명을 모아서 원불교에 소개해 청년회가 결성되도록 도왔다. 하지만 나는 결심한 바 있어 사업에만 매진하기로 했기에 원불교에는 아직 다닐 수 없다고 친구에게 말해두었다.

그 때 원평교당은 이양신 교무가 주임교무였다. 선후배들로 구성된 청년들은 수요법회를 다녔다. 그런데 그 선후배들이 수요법회가 시작되기 전이면 나에게 찾아와 교당에 함께 가자고 졸랐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와서 조르고, 또 번갈아가면서 부탁을 하니 어쩔 수 없이 원불교에 나가보게 됐다.

그렇게 한 두번 다니다 보니, 법회시간 설교를 들으면 뭔지 모르게 가슴에 와닿았고, 귀가 쫑긋해졌다. 그러는 사이 나도 모르게 원불교에 한발 한발 다가가게 됐다.

또 법회도 중요했지만 대산종사가 구릿골에 정양을 하실 때 청년들이 모시고 봉사활동했던 것이 참 즐거웠다. 비가 와서 길이 무너져 있으면 경운기 몰고와서 함께 보수작업도 하고, 원평교당도 매립지 매입하면서 유아원을 짓는다고 할 적에 모두가 함께 나서는 등 이런저런 활동 하나하나가 좋은 추억이 되고 점점 신심으로 쌓여갔다.

어느 날이었다. 어느 청년들은 집에 와서 나에게 '교당에 좀 다녀보니 재미가 점점 없어진다'고 했다. 내 인연으로 온 선후배들이라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고 상담을 해줬다.

나는 "나도 원불교에 다녀보니 좋고 옳은 법인줄 알지만 생각처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너희들과 마찬가지다. 신앙이란 어려서부터 가져야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 자연스럽게 재미와 성장을 할 수 있는데, 나이 들어서 하다보니 쉽지 않은 일임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러기 때문에 지금은 힘들지만 내 아이들은 이러한 고생을 겪지 않도록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신앙을 가지게 해야되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우리는 지금 생각처럼 잘 되지 않지만, 앞으로 아이들을 위해서 힘들고 안되지만 계속 함께 노력해보자"라고 말하니 다들 깊이 공감하며 호응했다.

고비는 있었지만 청년회 활동이 잘 되어가면서 전국교당 교무들이 청년회 결성 모범사례로 원평교당에 견학 오기도 할 정도였다. 그 당시는 전국적으로 교당마다 청년회 결성 활성화를 추진할 시기이기도 했다.

원평교당은 지금은 전북교구에 속해 있지만, 당시에는 이리교구에 속했다. 당시 소성교당, 승부교당, 태인교당 등을 우리 청년회가 돌아다니면서 청년회 결성법회를 같이 해주고 활성화하는 데 도움을 줬다. 원불교와 청년회에 대한 자긍심과 보람을 우리는 계속 키워나갔다.

군대를 다녀와 고향인 원평에 들어갈 때 '10년만 사업에 노력하자'고 결심했었는데, 이렇게 교당 청년회 활동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원불교와 인연이 깊어져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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