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 기도적공으로 이뤘습니다"
오롯한 신심으로 일원가족 이뤄
솔솔송봉사대 창립멤버, 30년 보은봉공

제법 무더운 날씨가 연일 계속됐다. 여름이 다가왔음을 실감케 하는 6월, 반쯤 열린 차창을 통해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도착한 전주 '원피아노' 학원엔 무더운 날씨만큼이나 뜨겁고도 호탕한 행복바이러스 연타원 임조련 교도(50·練陀圓 林照蓮)가 있었다.

"10살 때부터 할머니 손잡고 동산교당에 갔어요. 그 때는 입교가 뭔지 몰라서 무조건 교당에 나갔죠. 중학교 2학년 때 교무님이 '입교했니?'라고 물으셨고, 그렇게 원기65년 조련이라는 법명을 받았어요."

10살 때부터 교당에 다니기 시작한 그는 남편, 시어머니도 모두 교당에서 만났다. 평생 굴곡없는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그이지만, 결혼식을 올리기 전 시어머니가 열반한 일은 그에게 가장 큰 시련었다.

"남편을 교당 학생회에서 만났고, 남편이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를 다른 지역에서 다니는 바람에 10년간 보지 못했어요. 남편이 다시 청년회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연애를 시작했죠. 짧다면 짧은 1년간의 연애 기간동안 시어머니께서 열반에 들었어요. 남편은 그 당시 학생이었고, 홀로 남게 된 시아버지를 봉양할 사람이 없었죠.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집을 가게 됐습니다. 배에 복수가 차서 돌아다니지 못할 적에도 교당 행사가 있으면 문밖에 나와서 인사를 하던 시어머니의 오롯한 신심이 지금까지 우리를 일원가족으로 만들어 준 것 같아요."

소극적인 성격의 학생 신랑과 시아버지를 모시던 그는,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기 위해 피아노 학원을 개원하기로 마음먹는다. 넉넉치 않던 형편에 전전긍긍하던 그는, 100일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 78일째, 생각지도 못했던 땅이 아파트 부지로 들어가게 되면서 친정에 4천만원이 생겼고, 그 돈으로 학원을 개원하게 됐다. 모든 일이 기도적공 덕분이라고 말하는 그다.

"당시 학원 개원에 거리 제한이 있었어요. 피아노 한 대 가격도 상당히 비쌌고, 거리 제한 때문에 자리 찾기도 힘들었죠. 100일 기도를 올리던 중이었는데, 78일 기도부터 100일 기도까지 모든 일이 이뤄졌어요. 친구들과 지리산에 놀러갔을 때도, 기도는 빠지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봉우리에 올라가서 기도를 했어요. 그렇게 100일을 끊임없이 기도했더니 사은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 같아요. 결국 학원 건물을 찾게 됐고, 100일 안에 계약까지 마칠 수 있었습니다."

유난히도 밝은 성격의 소유자인 그의 별명은 '해피 바이러스'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어려운 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그는 동산교당의 '슈퍼 히어로'다.

"학생회 때는 교당에서 회장단을 역임했고, 교구에서는 교구학생연합회 부회장을 했어요. 대학교 때는 교당 청년회장을 했고, 전북교구 청년부회장도 했습니다. 방학 60일 중에 50일은 봉사활동, 여름훈련 등으로 집에 들어올 수 없었어요. 교당에서는 20살 때부터 피아노 반주를 시작해서 30년간 해오고 있지요. 3년 전에는 교당에서 봉사대를 만들었어요. 봉사대와 함께 성지에 가서 봉사도 하고, 농촌지역에 일손 돕기, 경로당 페인트칠, 독거노인 집수리 등 실질적인 책임을 다하고 있어요. 솔솔송자원봉사대 초창기 멤버로 지금은 이사직을 맡고 있어요. 30년간 꾸준히 봉사를 해오다 보니 원불교를 만나서 가장 기쁜 것은 20대 때부터이웃을 돌아볼 수 있는 '나'로 성장했다는 보람이었습니다."

청년회장시절, 회원들과 커피 장사, 찹쌀떡 장사를 하며 불우이웃돕기, 청년회 기금 마련을 해왔던 그는, 어린이·청소년·청년교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청년회 시절 벚꽃 피는 봄에는 목천포 다리 밑에서 커피를 팔았어요. 겨울에는 길을 돌아다니면서 '찹쌀~떡'을 외쳤죠. 지금 생각하면 춥고 힘든 일이지만 그때 당시 청년회원들에게는 정말 즐거운 추억이 됐어요. 저도 10살 때부터 할머니 손잡고 교당활동을 시작했고, 아들, 딸도 뱃속에서부터 교당에 다녀서 지금은 딸(박서은 청년)이 전북교구 청년연합회 부회장과 전북대 원불교동아리 교화부장도 맡고 있어요. 어릴 때부터 교당에 다니기 시작한 아이들이 교단의 주인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50세가 되던 해 법호를 받고 아직도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많다고 느꼈다는 그는, 이 세상에서 공부하는 게 가장 좋다고 말했다.

"친정어머니는 저에게 늘 '죽으면 어차피 썩을 몸, 아껴서 뭐하냐'고 하셨어요. 나는 조금 힘들지만 내 주위 사람들이 나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어디든 제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달려가고 싶어요. 이생에는 출가를 하지 못했지만, 내생에서는 꼭 출가를 하고 싶습니다. 늘 지금처럼 끊임없이 솟아나는 열정과 기쁨, 은혜를 더 많은 이들에게 나눠주고 싶어요." 온화한 그의 미소 속에서 샘솟는 교화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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