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자의 삶

▲ 강보광 덕무/중앙중도훈련원
원평교당에서 나를 포함한 청년들은 그 당시 청년회 담임을 맡았던 김민연 교무의 설교를 들으면서 서원과 신심을 키워왔다.

그러던 어느날 이양신 주임교무가 '대산종사께서 총부에 가서 살아보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나에게 전했다. 총부 간사로 살아보라는 말씀이셨는데, 당시 나는 간사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잘 몰랐다.

다만 그 말씀을 받들면서 '나중에 따로 사업을 할지라도 총부에 살고나면 스승님들 인격을 만분의 일이라도 닮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원평에 처자식을 두고 가방 하나 들고 총부에 갔다. 재무부 소속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당시 재무부에는 버스가 2대 있었고, 교정원장·공익부·영모묘원 차가 있었다. 이를 운전하는 기사들과 방을 같이 사용하며 생활하게 됐다.

그런데 당시에 기사들이 뜻이 맞지 않을 때는 싸우거나 담배를 피고 그랬다. 출가인들이 아니라 사회인들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곳에서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 분들에게 "여러분들이 여기온 것이 월급때문이겠지만, 우리가 함께 성지에 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니 싸우지 말고 서로 조심하며 삽시다"하고 정중히 말씀드렸다. 그렇게 해서 서로 합심합력도 하고, 이해도 해주면서 모두가 동고동락하며 잘 살았다. 그 때 함께 생활했던 강이중, 고도길, 이인상, 이진국, 장영근, 정경식 등 모두가 덕무로 공동 서원해 원기79년 출가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그렇게 출가까지 생각하는데에는 이양신 교무님과 김민영 교무님의 도움이 컸다. 총부에 몇 개월 살다보니 나는 내가 왜 사회나가서 사업을 해야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내가 사업을 해서 돈을 벌려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인데, 나는 이미 여기에서 이 법을 배울 수 있어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평교당에서 영모묘원으로 인사인동한 김민연 교무에게 상담을 했다. 그때 김민연 교무가 걱정을 털어놓았다. 원평교당에서 신심있고 잘 사는 청년이 총부에 살다가 자칫 신심잃고 퇴굴심나게 되면 어쩔까 하는 마음에 이양신 교무에게 내가 간사근무 하는 것에 반대의견을 냈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되지 않아 익산에 방문한 이양신 교무님 얼굴은 수심이 가득했다. 내가 무슨일 있으시냐고 여쭈어도 아무일 없다고만 하셨다.

그때 무엇에 홀렸는지 몰라도 나는 당당하게 "총부에서 제가 퇴굴심나서 되돌아갈까봐 그런 것이라면 걱정마십시오. 솔성요론에서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으라고 하셨기 때문에 제가 여기에 온 것은 원불교 믿으러 온 것이지 사람만 믿고 온 것이 아닙니다. 총부생활하다가 도중하차 할 일은 없을 것이니 걱정마십시오"라고 말씀드리고 안심시켜 드렸다.

그런 이후에 한참동안 총부에 살다보니 김민영 교무가 "처음에 총부에 가서 사는 것에 대해 걱정도 많이 돼서 반대를 했지만, 가만히 지켜보니 꼭 여기서 살아야 할 분이다"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여기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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