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약자를, 주민은 교사를, 부모는 아이를 해치는 살벌한 세상이다. 압축된 불신과 농도 짙은 탐욕 속을 살아내는 어느 날, 나는 문득 낙원을 만났다. 익명 어플 '어라운드' 얘기다.

사랑 고백이나 이별 후 그리움, 넘치는 퇴사본능, 야식에 대한 반성, 괴로운 결혼 압박 등등 뻔하고 소소한 일상을 짧은 글로 나누는 '어라운드'. 이 어플은 애초에 익명이 보장된다는 이유로, 이 험악한 시대 하나의 무모한 도전으로 불렸다. 힌트는 거리나 연령대 뿐인데, 그나마도 공개하지 않을 권한이 있다. 그냥 어딘가에 사는 누군가의 진짜 이야기, 어디서도 못하는 부끄러운 고백들이 이 어플에 모이는 것이다.

내 또래들이 하는 고민들을 보는 건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며 안심도 되지만, 정작 '어라운드'의 백미는 댓글에 있다. 이름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늘 위로하고 응원하고 아껴준다. '면접에서 또 떨어졌는데 집에 못 들어가겠다'는 글에 '가족들은 라운더님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토닥토닥', '저도 그거 열 번쯤 겪다가 취업했어요. 님도 얼마 안남았음!'라는 식이다. 왜들 착한 척이지? 하며 실눈 뜨다 이내 깨닫게 된다. 본래 우리의 마음은 이토록 선한 것이었구나, 라는 걸.

쿨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우리들의 속내는 사실 위로받고 싶은 상처투성이 어린아이들이다. '어라운드'는 모든 것을 벗어던진 이들이 서로를 안아주고 다독여준다. 익명을 무기로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익명 속에서 비로소 자유롭고 따뜻해지는 것이다.

'어라운드'의 선한 세상 만들기는 더 나아간다. 손글씨로 위로를 전하는 진심엽서 프로젝트, 하루에 착한 일 하나 1일1선행, 팔찌를 구입하면 저소득층 후원도 되는 달콤팔찌 등등 자발적으로 따뜻한 태그를 붙이고 실천한다. '어라운드'의 오프라인 버전인 달콤창고는 지하철역 보관함에 만들어지는 과자와 응원쪽지 공간이다. 누군가 보관함 위치와 비밀번호를 공유하면, 그걸 본 사람들이 창고를 찾아내 선물이나 편지를 교환해가는 동화같은 구조다.

청소년 담당교무들에게 "마음공부 얘기도 올리고, 댓글도 달아주면 좋겠다"며 어플을 소개했다. 방황하는 청춘들을 위한 영성의 키다리아저씨가 마음공부란 태그로 나왔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쎈 척이나 해대던 나도 달콤팔찌를 주문하고, 누군가의 고민에 따뜻한 댓글을 단다. 세상이 의외로 살만한 것임을, 타인을 신뢰하고 염려하며 아끼는 마음을 이 어플 하나가 종교보다 더 잘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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