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MZ 생태평화공원길은 양 옆으로 지뢰밭을 이루고, 이곳은 지뢰숲길 위로 놓여진 쉼터 다리다.
전쟁은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아군과 적군,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그렇다. 전쟁의 상처는 죽은 자보다 산 자에게 더 잔인한 기억으로 남아, 사람들은 부러 잊고자 했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6주년. 처참하게 짓밟히고 수많은 유해가 나뒹굴었던 비무장지대에는 이제 육안으로는 전쟁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 긴 세월 동안 뭇 생명이 자라 땅은 다시 소생했고, 철새는 전쟁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때를 따라 모여들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의 아픔은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에게 다시 삶을 얘기한다. 마치 그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말하듯이. 대자연의 조화 앞에서 인간의 삶은 잠시 스쳐가는 바람일 뿐이란 사실을 깨닫는 날, 한없이 부끄러웠다.

철원 DMZ 생태평화공원길에 서서

1953년 7월27일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이 3년간의 긴 싸움을 멈추고 휴전 협정에 들어갔다. 한반도에 군사분계선(휴전선)이 그어진 날이다. 서해안의 임진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강원도 고성까지 248킬로미터. 그리고 각각 2킬로미터씩 남방 한계선과 북방 한계선을 정해 비무장지대(DMZ)라 이름 붙였다. 이후 60년이 넘도록 이곳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생태보존구역이 됐다.

그리고 지난 5월21일 환경부, 국방부, 철원군이 공동협약을 맺어 철원군 비무장지대 인근에 DMZ 생태평화공원을 조성하고 민간인에게 첫 개장했다. 1코스 십자탑과 2코스 용양보 탐방로다.

넓은 평야를 차지하기 위해 휴전 협정을 앞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주인이 바뀌었던 땅, 철원. 전쟁의 포성은 멈췄지만, 아직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DMZ 안 한국전쟁 용사들의 유해는 해마다 발굴 중이다. 하여 실종자 가족들에게 있어 전쟁의 아픔은 과거의 기억이 아닌 현재이고 또 다시 맞이할 내일의 모습이다.

지뢰숲길을 따라 걸었던 DMZ 생태평화공원길은 한없이 고요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생태계는 다시 울창한 숲을 이뤘고, 야생화와 새소리, 시원한 바람이 탐방객들을 맞이했다. 걷는 동안 양 옆에 보이는 지뢰 경고문이 순간순간 가슴을 먹먹하게 할 뿐이었다. 60여 년 전, 휴전을 앞두고 왜 싸워야 하는지 그 이유조차 잊어버렸던 남북 참전 용사들처럼, 지금 우리는 왜 분단된 조국에서 살아야 하는지, 통일을 왜 해야 하는지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상념에 빠진다.
▲ DMZ 생태평화공원 1~2코스 개발된 종합안내도.
십자탑에서 바라본 북한

3일 철원군 생창리 DMZ 생태평화공원 방문자센터에 들러 미리 예약한 방문증을 받았다. 김화교당 박정묵 예비덕무의 안내로 이날은 십자탑 탐방로를 걷기로 했다. 후방CP에서 출발해 지뢰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십자탑이 나온다. 그곳에서 망원경으로 북한 땅을 내려다보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기까지 4개의 쉼터를 만난다. 다소 밋밋한 탐방로라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양 옆으로 설치된 지뢰 경고판이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한다.

성재산에 위치한 십자탑은 자유, 평화, 통일을 상징하는 전쟁의 산물이다. 때마침 쾌청한 날씨로 인해 한국전쟁 당시 남북의 최대 접전지였던 오성산(해발 1062m)이 빼어난 산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겨울이 되면 한반도의 킬리만자로라고도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오성산 아래에는 수많은 유해가 묻혀 있지만, 이제 그 세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망원경으로 바라본 휴전선 너머의 북한 비무장지대에는 주민들이 농사를 짓고, 철책을 지키는 OP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그곳에서도 삶은 이어졌고, 한없이 평화로웠다.

철원 DMZ 생태평화공원 방문자센터에서는 매일 2차례 탐방객들에게 오전·오후 코스별로 안내를 해주고 있다. 방문 신청은 미리 해야 한다.
▲ 지뢰숲길 따라 걸었던 DMZ 생태평화공원길은 한없이 고요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로웠다.
민통선 안 유곡리 사람들

북한과 다름없이 남한도 비무장지대 안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철원군 김화읍 유곡리 안석호 이장(75)을 만나 그들의 삶을 엿보았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통일촌이라는 표지석이 제일 먼저 반겼다. 파주 통일촌과 함께 이곳 철원 통일촌은 휴전 후 한 날 한 시에 마을사람들이 입주해 공동체를 이뤘다. 30대 초반에 이 마을에 들어와 43년째 살고 있다는 안석호 이장은 "처음 공고가 날 때 황무지를 개척해 땅도 주고 집도 준다고 해서 몇 백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왔는데 속았지. 지금도 자기 땅 없이 임대료 내며 입에 겨우 풀칠하며 사는 사람들도 많아. 당시 노동력 2인 이상, 3년 이상 생계가 가능한 사람들만 지원 자격이 주어졌어. 그렇게 어렵게 전국에서 모여든 60세대를 뽑아 선정해서 그런지 지금도 마음 맞추기가 어려워" 하며 힘든 점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황무지 땅은 당시 60세대 중 절반이 군을 제대한 사람들로 이뤄져 지뢰 제거하고 불도저와 포클레인으로 농경정리를 하는 데 수월했다. 그렇게 개관한 땅을 제비뽑기로 분배 받았다. 농사는 북한에서 내려오는 한탄강 물을 받아 짓고, 아이들은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부모 품을 떠나 40킬로미터 떨어진 일동, 이동 지역으로 유학을 갔다.

이제는 70~80세를 훌쩍 넘긴 1세대와 회갑이 돌아오는 2세대 서너 명 만이 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민통선 안에 자리한 마을이라 사전투표소가 마을 안에 3일 정도 설치된다는 것 말고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여느 시골마을과 같다.

하지만 과거, 위험지역이라는 인식이 없을 때에는 나물 캐러 갔던 할머니들이 지뢰밭에 들어가 죽거나 아들을 보러온 할머니가 까다로운 방문증 발급을 피하기 위해 산을 넘다가 지뢰를 밟기도 했다. 그럴 때면 북한이 원망스럽고 무섭기도 하다가 종종 대남방송에서 북측 OP를 지키는 군인들이 '커피에 밥 말아먹은 일'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소리를 들으면 정겹기도 했다.

한 날 한 시에 들어온 사람들이라 이장도 순환제로 돌아가면서 하다 보니 벌써 2번째 임기를 맡고 있다는 안 이장. 그는 "도로 포장도 하고 지붕 개량도 하고 황무지도 이제 다 먹기 좋게 개관했는데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니 찹찹하지. 젊은 사람들이 정착해서 살면 좋겠는데 빈 집이 자꾸 늘어나 마음이 좋지 않아. 그래도 떠날 수 없지. 이곳을 떠나면 어디가서 전세도 못 얻으니까. 천상 여기서 사는 것이제. 텃밭에 뭐라도 심으면 먹고 사니까" 하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전쟁이 나도 이곳은 방공호(대피소)가 설치돼 큰 위험은 없을 거라고 믿는 그에 말이 한편 안심이 되다가도 전쟁으로부터 무뎌진 우리의 삶을 그대로 보는 듯했다.
▲ 1코스 성재산 십자탑에서 내려다본 철원군에 멀리 보이는 마을이 김화읍 와수리로 근처에 김화교당이 있다.
철책 최전방 교화하는 김화교당

철원군 김화읍에는 김화교당(교무 우세관)이 교화를 펼치고 있다. 김화교당은 지역교화는 물론 일요일마다 300여 명이 넘는 군 장병들과 법회를 보고, 토요일에는 GOP 안 백골 혜산진교당과 진백골교당에서 법회를 연다. 우 교무는 6년째 군 교화활동을 인정받아 올해 육군 제3사단 백골부대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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