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장) 저마다 갊아 있는(靈性의 노래)
박광전 작사 / 김희조 작곡

1. 저마다 갊아 있는 아름다운 영성이나
검은 구름 삿된 인정에 묻힌지 오래었네
오늘도 내일도 영성불러 일으키어 본래
영성 되기까지 닦고 또 키워보세

2. 개자보다 더 작은 한 알의 종자이나
니구류 큰 나무도 그 종자로 이뤄졌네
너도나도 행여나 어렵다고 생각 말고
하루하루 쉬지 말고 계속 수행하여보세
▲ 영성의 노래는 마음을 명랑하게 이끌어 준다.
일원상 콘서트

〈성가〉 113장 영성의 노래의 작사가인 숭산(崇山) 박광전 교무는 대종사의 장남으로 교단의 정서는 박광전 교무가 대종사와 혈연이라 해서 특별한 인센티브는 없었으나 신학문에 대한 숭산의 의지와 교단의 공의에 의해 일본유학에 오르게 된다.

대종사는 박광전 교무를 일본 동양대학 재학 중이던 원기24(1939)년에 당시 구체적인 실체도 없던 불교전수학원장(佛敎專修學院長)에 임명하는데, 이는 숭산이란 재목에 걸 맞는 직책을 부여한 것으로 향후 교단 교육사업의 책임자로 기르려는 포석이었다 할 것이다. 이후 박광전 교무는 대종사께서'연구실터'라 지정한 곳에 원광대학을 세워 발전시키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숭산에게 있어 대종사와의 역사적 이벤트는 '일원상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문답이라 할 것이다. 이 문답은 원기23년(1938) 〈회보〉 46호(7·8월호)에 실린 법문으로, 숭산의 24세 때로 동경 동양대학 철학과에 재학 중일 때이다. 여름방학 중 일시 귀국하여 평소 궁금했던 일원상에 대한 질문에 부친이신 대종사께서 답변해 준 문답 법문으로 여겨진다.

〈대종경〉 교의품 3~6장에 등장하는 이 문답은'일원상 콘서트'로, 이 문답을 통해 대종사님은 숭산에게 일원상의 씨앗을 심어주었고 이 씨앗을 지성과 학문을 통해 더욱 꽃피우도록 부촉하신 것이다.

이 일원상의 문답은 향후 숭산의 사상을 관통하는 큰 물줄기가 된다. 일원상의 연구를 빼놓고 숭산학(崇山學)을 말할 수 없으며 그의 가장 큰 학문적 유업은 일원상의 연구라 할 것이다. 일원상학은 숭산학의 큰 흐름이며 또한 원불교 사상과 철학의 중추인 것이다.

대종사는 아마 철학적 사상의 훈련을 거친 박광전 교무의 성장을 기다린 것 같다. 이런 기다림을 통해 지성의 지반에 일원상을 심은 것이다. 숭산 종사에게 일원상 법문을 촉발시켜 일원상의 체현자요 발현자로 키운 것이다. 그 사람에게 그 만한 법문을 한 것으로 일원의 지성을 키워 그 터전에 일원의 학(學)과 일원의 덕(德)을 세운 것이다.

숭산 종사는 그동안 발표하였던 일원상의 연구를 집대성해 원기52년(1967) 동서 사상을 넘나드는 '일원상 연구'(원광대학논문집 제3집)를 발표한다. 이는 교학 최초의 일원상 논문이며 오랫동안 연찬해온 숭산의 필생의 작업으로, 대종사와의 일원상에 대한 문답의 깨달음의 풀이로서, 대종사는 흐뭇한 감정(勘定)을 해주셨을 것이다.

아름다운 영성이나

이 일원상을 박광전 교무는 영성(靈性)이란 표현으로 〈성가〉 113장에서 구체화하고 있다. 이 일원상이 아름다운 영성으로 우리에게 갊아 있다는 것이다. 마치 찬란한 태양이 검은 구름에 가려있듯이, 아름다운 영성이 삿된 인정에 오래도록 묻혀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아름다운 영성을 깨워 일으키자는 것으로, 본래 영성인 이 일원상을 그대로 일으켜 키우자는 것이다. 본래 아름다운 영성인 이 일원상을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실에서 그 경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해 가자는 것이다.

"개자(芥子)보다 더 작은 한 알의 종자이나 니구류 큰 나무도 그 종자로 이뤄졌네", 이 말의 배경은 〈구잡비유경〉에 나온다. 부처님에게 공양을 하는 한 부인에게 이 공양의 공덕이 많을 것이라 하니 이를 듣고 있던 남편이 반론을 펼친다. 이에 부처님께서 사위성 안의 니구류(범어 Nyagrodha)와 그 종자의 비유를 들어 '마치 개자보다 작은 니구류 종자를 심으면 이 종자가 커서 많은 열매를 맺듯이, 공덕의 씨를 심으면 결국 이 니구류 나무처럼 무량한 수확을 얻게 된다'고 비유함으로써 그의 의심을 혁파하고 있다.

숭산은 이 '종자와 나무'라는 관계의 비유를 통해 일원상의 성품을 설명하고 있다. 종자가 저마다 갊아 있는 영성이라면 나무는 그 영성이 큰 공덕으로 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종자로 보면 모두가 똑같이 갊아 있는 일원상의 성품이며, 나무로 보면 발현되어야 하고 키워야 되는 현실의 법력인 것이다. 종자의 입장에서 보면 나무가 될 요소가 다 있어 다시 무얼 준비할 것이 없으나,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키우고 또 키워야 되는 것이다. 종자에는 단계가 없으나 나무에는 단계가 있으며, 종자의 입장에서는 닦아야할 법계가 없으나 나무의 입장에는 닦고 닦으며 오르고 올라야할 법위의 단계가 있는 것이다.

종자의 차원이 절대계라면 나무의 차원은 현실계로, 본래 아름다운 영성은 현실의 모든 가능성을 다 갊아 있으니 그 자리에 들면 모든 것에 결핍감이 없으며 본래 만족하는 평화의 세계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우리에게 본래영성이 갊아 있다하더라도 그 영성을 우리의 삶에서 꽃피워야하는 현실의 노력으로 내려와야 하는 것이다.

마치 심지는 원래 요란함도 어리석음도 그름도 없는 '본래영성'이나 이 영성이 '검은 구름 삿된 인정'의 경계를 따라 요란해지고 어리석어지고 글러지게 된다. 이에 그 요란하고 어리석고 글러진 검은 구름과 삿된 인정을 원래 그 삿됨이 없는 본래영성으로 회광반조(廻光返照)하여 검은 구름과 삿된 인정의 그 경계에서 '아름다운 본래 영성'을 꽃피우자는 것과 같다. 그 경계에서 일원상의 영성을 세우자는 것이다. 시공(時空)을 초월하고 기질에 물들지 않는 그 본래영성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현실과 기질이라는 특성에 따라 발현해 가자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도 내일도 영성 불러일으키어 본래영성 되기까지 닦고 또 키워보자"는 것이며,""너도나도 행여나 어렵다고 생각 말고 하루하루 쉬지 말고 계속 수행하여 보자"는 것이다.

원음산책

〈성가〉 113장 영성의 노래의 반주를 듣노라면 하늘위로 높이 솟은 봉우리 사이를 거닐며 그 아래에 펼쳐지는 장대한 계곡의 웅장함에 탄성을 지르는 기분이 든다.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마음이 둥둥 떠가는 감탄의 연속이 펼쳐지며, 반주가 진행될수록 산수 따라 마음마저 잊고 씩씩하게 거니는 심정이 된다. 특히 첫마디의 악센트가 씩씩한 산행의 걸음처럼 마음을 명랑하게 이끌어 준다. 〈성가〉 113장 영성의 노래는 김희조 작곡으로 원기52(1967)년에 정화사에서 성가로 제정된다.
▲ 방길튼 교무/나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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