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자의 삶

▲ 강보광 덕무/중앙중도훈련원
총부생활 3개월쯤 되어서 출가를 결심하게 됐다. 당시 교정원장인 윤산 김윤중 종사를 모시면서 그때 사회생활의 습관들을 하나하나 고쳐가며 출가의 자질을 조금씩 갖춰가는 시간이었다.

그 후 원기75년도에 잠시 휴무를 내고 사가의 생계수단으로 신동에 하숙집을 짓고 있을 때, 중앙훈련원 원장인 법타원 김이현 종사의 연락을 받고, 집을 다 지을 때 까지는 거절하리라 굳게 마음먹고 찾아갔는데, 무슨 말씀을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으나, 그때 나도 모르게 '예!' 하고 대답을 하고나서야 함께 살겠다는 대답이었음을 알았다. 참으로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이 때가 법타원 종사를 모시게 되고 중앙훈련원과의 인연이 시작된 운명적인 시간이었음을 한참 뒤에서야 알게 됐다.

그해부터 바로 현재의 중앙중도훈련원 신축공사가 시작됐고 1년 넘는 공사 끝에 원기76년 11월에 훈련원 이사를 했고 명칭도 중산님 '중'자와 도타원님 '도'자를 붙여 중앙중도훈련원이라 당시 종법사이신 대산 종법사께서 명명하여 역사적인 봉불식을 하게 됐다.

봉불식이 끝나고 12월 즈음에 기계실에 기름이 유출 되는 사건이 있었다.
군산에 해경을 불러 자문을 구했으나 태풍과 같은 강한 비바람이 불어야 증발로 가능한데 이 겨울에 그런 일이 있겠냐며 방법이 없다며 돌아갔다.

전무출신 훈련도량에 훈련을 나기도 전에 이런 일이 생기고 가두리 양식장에서는 많은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등 그때의 긴박함은 말로 다 표현을 못할 정도였다.

나는 그날 저녁에 저수지 둑에 가서 무릎 꿇고 손모아 간절히 빌었다. '법신불 사은님! 저에 목숨을 내놓으라면 기꺼이 내놓겠습니다. 하오니 이곳 저수지에 비바람이 불어서 저 기름을 없애주세요. 그래서 전무출신 훈련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하고 가슴에서 울어 나오는 간절함에 엉엉 울면서 사은님께 통곡하듯 매달리며 오랜 시간 기도를 했다.

그날 밤에 기적이 일어났다. 진짜 비를 동반한 세찬 바람이 다음날까지 불어주었다. 우연일지 모르겠지만 분명 기도 후 기적같이 세찬 비바람에 기름이 눈에 띠게 없어졌다.

어느 정도 저수지 오염이 해결됐지만 가두리 양식장의 보상 문제가 거셌다. 이 때 법타원 종사는 "이것은 내 인과요, 책임자로써 내가 그 책임을 지고 해결하겠다"고 말씀하시고 출가 하신 뒤 사가에서 주셨던 돈으로 경제적인 해결을 혼자서 하셨다.

이 때 나는 법신불 사은님께 올린 기도위력을 처음으로 체험하게 되었고, 법타원 원장님의 주저 없이 운심처사 하시는 모습에서 크게 감동하고 배웠다.

그 후 어느날 법타원 종사께서 "이제는 식구들끼리 저녁에 공부를 합시다"고 했다. 나는 아직도 내가해야할 일들이 산적해 있는데, 내 세정도 모르시는 것 같아 "원장님 저는 금생에는 복만 짓고 다음 생에 정식으로 공부를 하겠습니다"고 말씀드렸더니 법타원 종사는 "그럼 그렇게 하세요" 하시고 더 말씀이 없이 그냥 가신다.

'그래도 공부하자고 한 번 더 하실 만한데, 서운한 마음이 든다. 왜 그러셨을까?'하고 깊이 생각해보니, 대종사께서 수염에 붙은 불 끄듯이 공부하라고 하셨고, 또 일을 잘 하는 사람이 공부도 잘하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 하셨다.

그러니 사람으로 몸 받아 좋은 스승님 만났을 때 공부하지 않으면 언제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정신이 번쩍 났다. 그래서 이튿날 바로 법타원 원장님을 찾아뵙고 "제가 어제는 어리석었습니다. 공부하게 해주십시오" 말씀드리고 당시 '성리대전'을 공부했는데 그때의 보람은 잊을 수 없다. 나에게 큰 자산으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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