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자의 삶

▲ 강보광 덕무/중앙중도훈련원
훈련원에 살면서 법타원 김이현 원장님을 시작으로 당시 혜타원님, 항산님, 관타원님, 경산님, 전산님, 종타원님, 현재 왕산님까지 여덟 분의 원장님을 모시게 된 홍복을 입었다.

그러던 중 나에게 시련이 닥쳤다. 형제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살던 집을 매각해야 했다. 직장에서나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고통을 버티며 지쳐갈 때, 혼자 대각전에 엎드려 통곡하듯 기도를 올리다가 홀연히 진리가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시험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슬픔이 용기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원기88년 11월 경산 장응철 원장님이 훈련원에 부임하고 리모델링에 화두를 두고 지내다가 드디어 원기90년 말을 훈련원 건물 리모델링을 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훈련원에는 기금이 5억 남짓 밖에 없었기에 1, 2, 3 단계로 계획을 세우고, 원장님은 새해부터 여러 교당에 법문엽서보내기와 법회 설법을 다니며 리모델링할 기금확보에 온갖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전일에 있었던 나의 고통은 인과를 철저히 깨달아 공사할 때 '헛돈이 새어나가지 않게 잘하라고 진리가 나를 훈련 시킨 것이구나'하고 생각했다.

원기91년 기금 정도에 맞춰 2단계까지인 15억원에 제일건설과 계약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가 시작된 후 원장님이 갑자기 종법사로 추대돼 공사를 나에게 일임하고 강낙진 부원장과 함께 총부로 가셨다.

얼마 후 후임 원장으로 전산 종사님이 부임해 나머지 공사를 마무리 하게 됐다. 공사비 관계로 숙소와 대각전, 법경관까지만 공사 계약을 했으나 제일건설 훈산 대호법 사장님의 공덕으로 외벽을 포함한 전체를 신축건물에 준하는 공사를 하게 됐다. 이후 훈산님은 중산님, 도타원님과 함께 중앙중도훈련원에 큰 공덕주가 되셨다.

또한 이렇게 되기까지 뒤에서 남모르게 제일건설에 권선을 해준 삼동원 신산 김혜봉 원장님의 숨은 공덕이 컸었다.

드디어 많은 어려움과 시련 끝에 원기92년 6월4일 봉불식을 하게 됐고, 나로서는 감격의 눈물이 날 만도 한데, 신기하게도 진리님이 나를 훈련시켜 공사기간에 지혜와 힘을 주셨고, 나는 진리의 심부름만 했다는 생각에 상이나 감정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나도 중생인지라 '공사를 맡기고 총부로 간 종법사님이 따뜻한 격려 말씀이나 안부 한마디라도 해주실 법도 한데'하며 아쉬움이 있었다. 봉불식을 마치고 훈련원 식구들이 종법사님께 인사드리러 조실에 갔다. 종법사님은 내 손을 잡아주며 "진산! 사리 많이 생겼지!" 딱 이 한 말씀만 하신다. '육신 고생도 있었지만 그보다 마음고생도 더 많았지!' 하는 메시지로 들렸다.

'아~ 종법사님은 말씀은 안 하셨어도 내 세정을 다 알고 계셨구나! 작은 공덕이라도 자만하여 까먹을까 봐 덮어주셨구나'고 생각하니 울컥하며 눈물이 핑 돈다.

이 한 말씀에 이제까지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다 녹아내리는 듯했다.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원기91년 진산이란 법호를 받고 그 기념으로 당시 경산 원장님이 써준 '무아봉공'이란 법문을 받고 오늘도 나는 나를 놓는 공부와 영생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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