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원로수도원 장경안 원로교무
여자교무로 피난가지 않고 정산종사와 총부 지켜
정산종사 이 전쟁 오래 안간다, 안심 법문 내려

▲ 장경안 원로교무는 한국전쟁 당시 정산종사를 모시고 총부를 수호했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했다.
한국전쟁 당시 정산종사를 3개월 여 모시고 총부를 수호했던 혜타원 장경안(惠陀圓 張景晏·93) 종사. 중앙여자원로수도원에서 만난 그는 몇 명 남지 않은 유일학림 1기생으로, 구십 노구에도 불구하고 전쟁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기억했다.

"1950년 한국전쟁(6·25)이 터지자 중앙총부를 비롯해 지방의 교당들도 피난 준비에 여념이 없었어요. 북한의 남침으로 수도 서울이 함락되자 총부에도 피난이야기가 돌면서 술렁이게 되지요. 특히 총부는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참전과 피난이야기로 분분했습니다"며 당시 위급했던 상황을 전했다. 그는 정산종사를 비롯한 어른들은 '우리가 총부를 지킬 테니 저희들은 어서 어서 피난을 가라'고 재촉했다고 밝혔다.

그해 7월12일 오전11시 이리역이 미군의 폭격으로 폭발하면서 참혹한 전쟁의 공포는 극에 치달았다. 인민군들의 기세에 대전지구 유엔군은 금강 남안에서 전략적 후퇴를 하게 된다. 이날 미군은 B29 전폭기 50대가 폭탄 약500톤을 싣고, 북한군 중요 군사목표에 투하하는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인민군의 진격 소식이 전해지자 총부는 더욱 다급해졌다.

"유일학림 2기 여성 교무들은 김제 원평으로 피신을 갔지요. 그때는 조갑종 선생이 우리들에게 피난 가라고 제일 다그쳤지요. 그런데 정산종사께서는 피난을 가지 않고 총부를 수호하겠다고 하셨어요. 그 광경을 보고 나는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여러 차례 정산종사께 남아있게 해 달라고 간청을 했지요. 다행히 끝까지 말리지 않아서 정산종사님을 모시고 전쟁을 겪게 됐지요." 그러면서 여성교무로는 용타원 서대인, 성타원 이성신, 한타원 유장순이 정산종사를 모시고 총부를 지켰다고 담담하게 진술했다. 인민군들이 총부에 들어온 날은 7월16일쯤이었다.

공회당, 인민군 주둔지 되다

인민군들이 익산까지 내려왔다는 소문은 금세 펴졌다. 피난을 떠나지 않고 총부를 수호하겠다고 남아 있던 사람들도 한순간 공포에 휩싸였다. 그는 정산종사와 남자교무들은 종법실 지하로 피신했고, 남아있던 여자교무들은 복숭아 밭(원광대 쪽)으로 피신을 했다고 회상했다. 그와 여자교무들은 총소리와 행군소리가 가까워지자 불안한 마음에 총부로 달려갔다.

"누군가 원불교는 우익이라는 이야기를 했나 봐요. 인민군들이 다짜고짜 총부로 쳐 들어 와서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어요. 종법실 지하에 피신해 있던 정산종사님을 비롯해 남자 교무들이 들키고 말았지요. 인민군들이 총부리를 정산종사님과 남자 교무들에게 겨누며 신문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신문하고 조사해 봐도 별 이상한 단서들이 안 나오니 중산 정광훈, 한산 이은석 교무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빼앗아 갔어요."

그렇게 하고 물러날 것으로 예상했던 인민군은 아예 총부를 주둔지로 삼아 버렸다. 이후 그는 정산종사를 모시고 인민군이 물러나기 전까지 총부를 수호하게 된다. 이에 앞서 총부에 남아 있던 이들은 인민군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종법실에 있던 짐을 대각전 천장으로 옮기는 작전을 전개한다.

"나와 이은석, 유장순 셋이 밤에 만약을 대비해 종법실 짐을 대각전 천장으로 옮겼지요. 한여름 늦은 밤에 짐 상자를 나르는데 땀이 흠뻑 젖을 정도로 났어요. 학원생들의 짐은 현 공덕원 부엌에 넣고 흙으로 봉했고, 대각전 천장에 옮긴 짐은 차곡차곡 쌓은 후 표시가 나지 않게 마무리했지요."

정산종사, 대각전→송대 주석

인민군들이 총부를 점령하자 정산종사와 제자들은 대각전과 정미소로 숙소를 옮겼다. 그는 인민군 100여 명이 공회당을 중심으로 주둔해 있었다고 밝혔다.

"여름이라 총부 정원은 인민군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자는 공간이었습니다. 밤에 이동한 후 새벽에 총부에 도착해 휴식을 취하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숙소나 나무 그늘 밑은 누워 있는 인민군들이 많았죠. 장교들 숙소는 공회당을 썼지요."

인민군의 주둔지다보니 병력의 교체와 이동이 잦았다는 것이다. 총부 내 인민군들의 훈련 장소는 송대 숲과 공회당 안과 주변이었다고 덧붙였다.

"인민군이 총부를 점령했을 때, 미군 비행기들이 엄청 낮게 총부 하늘을 날았어요. 그래서 비행기가 오면 폭탄이나 총을 쏘기 때문에 무조건 숨어야 했지요. 심지어 비행기가 낮게 날 때 어른들은 풀 등을 뒤집어 써야 했고, 목소리도 다 듣는다고 대화도 못하게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그와 선진들은 증산대를 조직해 정미소와 밭에서 일거리를 찾아 봉공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다만 총부에 들어올 때는 검문을 거쳐 완장을 차야 했다.

"정산종사께서 송대에 계실 때는 그 주변만 산책하셨고, 늘 접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잠깐 뵐 수 있었죠. 송대로 가려면 총부 정문은 인민군이 지키고 있어서, 외곽으로 돌아서 가야만 했지요. 그 당시 총부는 공회당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었습니다."

그와 여자교무들은 인민군과 함께 생활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공부인 다운 수도생활을 지속했다.

"어느 때는 총부 구내를 출입하는 여자 전무출신들에게 정산종사께서 '삼베치마를 입었어도, 어째 남의 집 며느리 같지 않고, 내 딸 같으냐'하고 칭찬해 주셨어요. 삼베치마를 입었지만 인민군들에게 허투루 보이지 않기 위해 정갈하게 입고 다녔지요."

전쟁 중에도 정산종사를 모시고 살아서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고 밝힌 그는 "종법사님을 뵈오면 늘 좋았고, 따뜻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정산종사님은 대각전에 계시다가 8월부터 송대로 숙소를 옮기셨죠. 대각전에 계실 때는 정미소에서 식사를 하셨어요. 송대로 옮긴 뒤로는 그 곳을 벗어나지 못했고, 식사도 송대에서 하셨지요." 정산종사는 송대에 주석하면서 인민군들의 퇴각을 지켜봤다고 증언했다.

걱정 말아라 전쟁 곧 끝난다

그는 "정산종사께서 우리들에게 '절대 동요하지 말라. 이 전쟁은 얼마가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있어라. 이제 전쟁은 없다. 피 흘릴 일도 없다'고 자주 부촉해 주셨다"며 공포와 위험에서 위안 법문을 내렸다고 전했다. "동산선원 쪽에 대타원 이인의화님이 살았죠. 이 분은 대종사께서 생전에 인증을 했던 분입니다. 정산종사는 인민군이 점령 중에도 이 할머니와 늘 교류했어요. 그때 심부름을 응산 이완철 종사가 맡았죠. 정세와 시운을 서로 맞춰보며 의견을 교환했다고 들었어요"

원기28년(1943) 소태산 대종사 열반 이후 종법사로 취임한 정산종사의 어려움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대종사 열반 이후 젊은 정산종사를 모시려니, 총부 사람들이 힘들었죠. 대종사께서 아버지라면, 정산종사는 형제 벌 되잖아요. 대중들을 잘 거느려도 말이 많았고, 못 거느려도 한마디씩을 했죠. 그런 와중에 전쟁이 나서 인민군들이 총부를 점령하자 대중을 지도하기가 더 어려워진 거예요. 한산 이은석 선생과 중산 정광훈 선생이 주축이 돼 대중의 반발을 무마하고, 정산종법사를 보필했지요."

식당 공양을 맡아 보필하다

정산종사가 '이 전쟁 얼마가지 않는다'는 부촉처럼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인민군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음력8월14일, 추석을 하루 남겨두고 물러간 것이다.

인민군이 총부를 점령했을 때 그가 맡은 임무는 식당에서의 조리였다. 토탄(土炭·나무가 썩어서 흙이 된 탄)을 캔 후 말려서 풀무질해 연료로 사용했다고 언급한 그는 늘 정산종사의 식사가 걱정이었다고 회고했다.

"전쟁 중 없는 살림에 제일 걱정은 정산종사님의 진지였습니다. 제일 많이 올린 것이 고구마순 요리였던 것 같아요. 빨간 생 고추를 돌확에 깔아서 고무마 순을 무쳐 반찬으로 냈지요. 고무장갑이 없어서 맨손을 하면 얼마나 맵던지, 밥한 솥의 김을 쏘이면 개였어요." 매일 돌확을 이용해 보리를 3번 갈아 밥을 지었다고도 말했다.

사실 그는 사가(영광 백수면 대전리)에서 밥 한번 짓지 않고 살았다. 넉넉한 집안에 성장한 그는 이리역 폭파 사건 이후 학질(초학)로 인민군들이 총부에 주둔하는 내내 고생했다. 아프다고 쉴 수 있는 것이 아니여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김치를 담갔다. 산업부원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힘든 일을 하면서 건강은 날로 악화된 것이다.

"나중에 주사를 맞아 완쾌되지만 주사 후유증으로 살이 썩기도 했지요. 매일 밥을 지어 공양을 준비해야 했기에 식사 준비를 해 놓고 자리에 눕기를 거듭했습니다. 어떤 때는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식욕이 완전히 떨어져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전신이 벌벌 떨릴 정도로 몸 상태가 안 좋았지만 다행히 병을 이겨내며 정산종사를 모시고 총부를 수호할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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