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자의 삶

▲ 김도호 도무/원광효도마을
나는 김성택 원로교무와 고 손경덕 정토의 2남 1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모태신앙으로 시작된 원불교와의 만남은 특별했지만, 그 특별함을 알기까지 나는 많은 시행착오와 성장통을 겪었다.

질풍노도의 학창 시절, 방황 끝에 만난 원친 22기 선배들의 끈질긴 챙김으로 나갔던 정토회교당 학생법회는 신세계였다.

따뜻하고 정감 있는 선후배들과 함께하면서 스스로 위안을 얻었고, '내가 느낀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이같은 재미를 맛보게 하면 밝은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친구인 김정원 교무(영광 해룡고등학교 교당)와 교화단을 맡아 활동을 잘해보고자 의기투합하게 됐다.

선배들에게 배운대로 후배들을 챙기고자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교당에 가서 전화로 법회출석을 독려하여 많은 선후배들이 한데 어울려 법회를 보게 되는 기쁨과 보람을 얻었다.

앞에서 챙기는 건 회장단 몫이었지만 뒤에서 소외되는 이가 없도록 챙기는 것은 정원 교무와 나의 몫이었다.

또한 정정규(세훤), 김신관 형님처럼 대선배이지만 법회에 나와 후배들을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선후배 관계를 통한 학생법회의 구심점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겪은 학생회 활동의 재미와 보람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었기에 청소년 교화의 서원을 세우고, 원기82년 황대원 교무님의 추천으로 출가하게 됐다.

서원관에서는 박동경 형님을 만나 청개구리(청소년 교화연구반) 활동을 했는데, 당시의 경험이 오늘날 원광효도마을에서 진행하고 있는 효실천동아리 사업의 기반이 됐다.

현실적인 청소년 교화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경험을 해보라던 조언이 늘 생각해도 감사한 일이다.

군 제대 후 남중교당에서 늦은 간사근무를 하게 됐다. 모든 일의 시작이 관심이듯이 이효원 교무님과 이법전, 송정현 교무의 은혜 속에서 청소년 교화의 시작은 정성과 경험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됐다.

우리 교화에 정답지는 없지만 실패한 과정을 통해서 얻은 경험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스스로 답을 찾게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원관에 복학하고 나서는 과한 욕심과 부주의로 건강을 상하게 되었고, 학부 내내 고달픈 생활의 연속이었다.

결국 4학년 2학기를 마치고 악화된 건강을 회복하고자 노력했고, 수술 대신 기공침술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더딘 회복과 바닥을 치는 체력으로 집 밖 출입을 끊게 되었고, 심신 간에 자유로움이 아닌 어지로움으로 내내 시간을 보내다가 원광효도마을 오희선 교무님의 부름으로 정화수도원에 며칠 간 자원봉사를 가게 됐다.

학생회를 처음 나갔을 때의 느낌처럼 정화수도원 원로님들을 통해 얻은 위안으로 심신 간의 치유가 되어 다시금 잃어버린 청소년 교화의 서원을 이어가게 되었다.

전문적인 분야로 청소년 교화프로그램을 만들고자 도무로 원기92년 출가하여 오늘 날 오희선 교무님과 오우성 교무님의 가르침으로 전국 효문화 확산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대산종사는 "시방을 다 좋게 해주고도 남는 마음이 크게 공변된 대공심이니 크고 텅 빈 마음에서의 도와 덕력을 갖추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나의 공변된 대공심은 효실천을 통한 인성교육으로 시대적 요구이자 우리가 다가가야 할 청소년 교화의 열쇠라고 생각한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