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저 〈처음처럼〉에 '개가모의 접견'이라는 글이 있는데 글 중 화자(話者)의 말이 매우 감동적이다. 42세 되는 재소자가 있는데 그에게는 오랫동안 면회 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랜만에 접견 호출이 있어 그도 놀랐고 동료들도 놀랐다. 접견을 하고 와서 누가 왔었는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동료들이 누가 왔었느냐고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다가 여러 차례 다그쳐 묻자 마지못해 "아니 나도 모르는 사람이 왔어요"하며 시큰둥하더란다. 모르는 사람이 면회를 오다니? 나중에 이야기를 듣고서야 이해를 하게 됐다.

생면부지의 남자와 철창을 사이에 두고 당신은 누구요? 하면서 서로 신분을 확인하느라 짧은 접견시간은 다 흘러갔단다.

내용인즉 재소자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생계가 막막한 어머니는 두살, 세살된 남매를 삼촌집에 맡겨놓고 멀리 재가를 갔다. 재가해 간 집은 남매를 두고 그들 어머니가 돌아간 집이었다. 면회 온 사람은 재소자 어머니가 재가해 키운 집의 아들로 40여 년의 세월을 건너 찾아온 것이어서 서로 딱히 할 말도 없었다. 몇 마디 대화 후 그가 돌아가면서 하는 말이 "당신 어머니를 우리 어머니로 모시고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내가 그 속에 있고 당신이 밖에 있을 수도 있겠지요. 위로가 될 만한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습니다. 건강하십시오"라고 했다.

접견 온 친구가 대단히 훌륭하다 느꼈고 그의 말에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사람은 그런 가족사를 어렸을 적엔 몰랐을 것이고 좀 자라서는 다 그런 거지, 다 운명이지 하면서 무심히 흘러 보냈을 수도 있다. 중년에 들어선 그는 어떤 계기에 깨달음을 얻어 길러준 어머니가 한없이 고마웠고, 어머니가 두고 온 아들딸의 안부도 궁금했고, 자기처럼 잘 성장했기를 기대했을 터이다. 그러다가 어느날 어머니가 두고 온 아들이 교도소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착잡한 마음으로 면회를 가서 앞에서 했던 말을 건넨다. 사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재소자의 어머니가 재가 가지 않고 아들을 잘 키우고 면회 온 자가 좋은 새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면 얼마든지 그런 가능성은 있다. 이웃의 가난과 고통이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 내가 누리는 행복이 누군가 갖지 못한 행복의 일부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정전〉 수행편 최초법어 강자·약자 진화(進化)상 요법에 강자가 영원한 강자가 되는 길은 "강자는 약자로 인해 강의 목적을 달성하기 때문에 강자가 약자에 강을 베풀 때에 자리이타의 법을 써야 한다"는 요지의 말씀이 있다. 유리한 입장에 있는 자는 강자이고 불리한 입장에 있는 자는 약자라고 볼 수 있다. 유리한 입장에 있는 자는 자리이타 정신으로 불리한 입장에 있는 사람을 배려하면서 살아야겠다.

<북광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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