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의 힘

▲ 황풍년 편집장/전라도닷컴
전라도 골골이 섬섬이 취재를 다니다가 이따금 할매들과 실랑이를 한다. "밥은 묵었능가?"하며 끼니 걱정을 해주고 "이것 잔 가지가소" 뭣이든 아낌없이 손에 들려주는 분들이지만 사진 찍기는 한사코 마다하는 게다. 이러쿵저러쿵 한참동안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엄니!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되지요?"라는 부탁에는 우선 손사래부터 친다. 살갑게 대해주다가도 얼굴색이 바뀌면서 역정을 내는 분도 있다. "늙어서 쭈그렁 망태가 된 우덜 찍지 말고 팽팽한 각시들을 찍어야제."

그저 늙고 추레한 노인이니 남에게 내보이기 민망하다며 몸을 빼고 고개를 돌리는 정경은 언제 봐도 애잔하기만 하다.
"아따! 엄니는, 곱기만 허요. 그라고 자식새끼들 키우고 갈침서 고생고생 하느라 생긴 주름살이 뭣이 챙피허겄습니까, 떳떳허제."

카메라를 치우라는 할매의 마음을 되돌려놓으려는 빤한 수작이 아니다. 지아비와 자식을 내세우며 당신은 늘 그늘진 뒷자리를 묵묵히 지켜온 우리네 엄니들의 얼굴은 찬찬히 들여다볼수록 곱고 곱다. 마음은 더욱 따숩고 고와서 "엄니, 나 사진 없으문 회사가서 혼나요" 하며 사정을 하면 십중팔구 완강하던 태도를 누그러뜨린다.

"허허 차말로 어째야쓰까잉…. 그라문 조깨 있어봐. 머리크락이라도 언능 빗어야 흔게로."

아쉬운 대로 손빗으로 쓱쓱 흩날리던 머리칼을 뒤로 넘기기도 하고, 쪽진 머리를 금세 풀었다가 단단히 여며 비녀를 다시 꽂기도 한다.

마침내 카메라 앞에 서는 할매들을 바라보는 순간 '아하! 헤어디자인이란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모양을 바로잡은 뒤, 마음먹고 자신을 보여주려는 사람이 갖는 최소한의 예의 말이다.

"가만 잔 있어보씨요 잉~. 암만해도 접시를 이삔 놈으로 놔야겄구만. 옳제! 요 꽃무늬가 더 낫겄제? 근디 색깔이 어울린가 모르겄네."

전라도 토종음식을 취재할 때 밥상을 차리며 그릇 고민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아짐들은 무심코 음식을 차리다가도 움찔 놀라며 무늬와 색깔을 따져본다. '평소처럼 소박한 시골밥상'이면 된다고 해도 찬장 깊숙한 곳에 고이 간직해둔 새 그릇을 꺼내기도 한다. 기어이 맞춤한 밥상을 연출하려는 아짐들은 요즘 말하는 '푸드스타일리스트'다.

디자인이란 용어조차 모르는 분들도 모양, 무늬, 색깔을 염두에 두면서 살림을 보여주거나 밥상을 차린다. '이쁜 것' 혹은 '보기 좋은 것'을 찾아 성가신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게다.

시골 할매들이 연출하는 디자인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어슷어슷, 나박나박, 너푼너푼, 쫑쫑쫑…. 예컨대 푸성귀 하나를 썰어도 재료에 따라 먹기 좋도록, 양념이 잘 배도록 크기와 모양을 조율한다. 오일장 어물전에도 효율적이고 보기도 좋은 미학이 있다. 그냥 질서 없이 부려 놓은 좌판도 있지만 대개는 나름대로 오(伍)와 열(列)이 있기도 하고 손님들이 보기 좋고 사기 편하도록 공을 들인 좌판의 '심미안'이 돋보인다.

"큼지막흔 에미부터 자잘흔 새끼까지. 조르라니 크기를 맞촤감서 늴여농께 찾기 쉽잖애. 흐건(흰) 놈은 흐건 놈대로, 까만 놈은 까만 놈대로 모태야 흐고…."

고수일수록 생물은 생물대로, 건어물은 건어물대로, 조개며 생선이며, 척척 갈무리를 하고 멋지게 판을 벌이는 '디자인'은 탁월한 예술이 아닐 수 없다. 시골 할매들은 헤어디자인, 의류디자인, 설치 예술의 틀림없는 원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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