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자의 삶

▲ 최대규 원무/어양교당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고등학교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읽었음직한 소설 〈데미안〉의 한구절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 그때는 내 인생에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이 아니었던가. 앞으로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친구들과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절. 새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 자기가 소유한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는 것에 공감했던 것은 아마도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그 시절의 청춘이라 가능했으리라.

틀이라고 할까 습관이라고 할까. 누구에게나 자신이 가진 세계는 하나씩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직장, 교당, 모임 수많은 만남들과 관계가 있지만 결국 자신을 중심으로 사람들과의 만남과 관계를 형성해 나아간다. 그리고 이런 모든 만남과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나의 틀대로 바라보고 사고하면서 취사를 하는 것 같다.

내가 원불교 마음공부를 하면서 깨달은 사실 가운데 하나가 '이러한 틀이 바로 업이 아닐까'하는 것이다. 그 틀이 업이라면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했던 말처럼 그 틀을 버림으로써 업장을 소멸하고 새로움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교당 생활을 하면서 내 자신이 먼저 내가 가지고 있는 틀들을 하나씩 깨뜨려야 새로움으로 나아갈수 있다는 걸 느꼈다.

이러한 내 틀을 깨뜨린 일이 있었다. 지금은 다른 교당으로 이임한 문수영 교무님이 어양교당 청년 담임교무로 봉직할 때다.

어느날 나에게 '교당 청년들에게 교당 어른들이 멘토가 되어줄 수 있도록 멘토링 법회를 추진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순간 나는 '청년들이 취업 이외에 무슨 관심이 있을까? 취업 준비에도 바쁠 텐데 취업과는 상관이 없는 다른 분야에서 살아온 분들의 이야기를 필요로 할까?'하고 고개를 저어졌다. 그러면서 멘토링 법회에서 옛 시대를 살아온 어른들이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해줄 말이나 있을지, 또 청년들이 요구하는 이야기의 코드는 맞을지 걱정됐다.

이런 의문들을 품은 채 멘토링 법회를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고 나니 내 의심은 기우에 불과했다. 각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이나 삶의 경륜을 가진 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청년들이 꼭 들어야 하는 세상 살아가는 지혜였고, 청년들은 그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는 존귀한 법문이었다.

외과의사로서 평생을 환자들을 모시고 살아오면서 배운 세상살이의 지혜를 전해준 교도님, 개인사업에서 닥친 인생역정 속에서 삶의 가치와 태도의 중요성을 알려준 교도님 등 그 자리는 살아있는 법문이었고, 청년들에게는 다시 갖지 못할 큰 경청의 시간이 됐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정말 소중하고 진지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의 틀 속에서 성급한 판단을 했구나'하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의 틀을 버리고 나아가는 세상이 선과 악이 공존하는 양면적이고 이율배반적일지라도 하나의 틀을 버리지 못하면 다음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그리고 이러한 틀을 버리는 일들이 경계따라 취사마다 늘 필요함을 느꼈다.

이러한 느낌과 경험들은 앞으로 원불교 원무로서 더욱 큰 보감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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