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진희 교사/강일고등학교
서울시 교육청에서 전화가 왔다.
"스승 찾기 행사에서 ○학생이 선생님 근무하는 학교와 휴대폰 번호를 알려달라고 했어요. 알려줘도 될까요?"
"네, 알려줘도 됩니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 눈썹이 유난히 짙고 또래 아이들이 감히 덤비기 힘든 다부진 체구. 그때가 90년대, 내 나이 30대 초반이었다.

서울 구로동의 ○고등학교, 3월2일, 운동장에서 입학식을 마치고 우리반 학생들을 인솔해서 교실로 들어왔다. 몇몇 학부모들은 어떤 교실에서 우리 아이가 공부를 하는지, 담임이 누군지 궁금한 모양이다. 애써 학부모의 시선을 모른척하고 학생들에게 이런 저런 안내를 했다.

"정식으로 회장을 선출하기 전에 임시 회장을 뽑아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창가 쪽 맨 뒷자리에서 눈썹 짙은 학생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잘생긴 순으로 하면 어떨까요?", "그래, 그럴까? 그럼, 누가 제일 잘 생겼지?"
"접니다. 헤헤."

그때부터 그 학생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지각은 기본이고 여러 차례 흡연으로 적발됐다. 위력을 가해 다른 학생의 도시락을 뺏어먹기도 하고 옷을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시험 시간에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엎드려 자기도 했다. 그것을 야단치는 교사들에게 눈을 부릅뜨고 씩씩거리다가 학생생활부에 불려갔다. 우리반에 들어오는 많은 교사들이 그 학생 때문에 수업을 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교직원 식당에서는 거의 매일 그 학생의 뻔뻔스럽고 다소 용맹스럽기까지 한 전투 이야기가 펼쳐졌다. 그때마다 나는 누나와 엄마의 심정으로 학교에 선처를 호소했다. 그 학생도 그걸 아는지 나에게만은 함부로 하지 않았고 오히려 깍듯이 예의를 갖추어 대했다.

그 시대 수학여행 단골 코스였던 감포 앞바다에서의 일이다. 학생들은 해변에서 사진 찍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때 어느 아주머니가 다가오더니 선생님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따라오라고 손짓을 한다. 횟집 주인이었다. "달라고 해서 주기는 했는데, 학생들이라서 아무래도 좀…" 가보니 학생생활부 단골손님인 학생들이 모여 회를 먹고 있었다. 그 학생은 나를 보더니 당황해하는 표정도 없이, 싱싱한 회를 빨간 초장에 찍어 상추에 쌌다. 그리고 "선생님, 아, 하세요. 맛이 기가 막히네요." 어이가 없었다. "아주머니, 소주는 치워 주시구. 야! 이 녀석들아, 대충 먹고 빨리 나와. 버스 떠난다."

별짓을 다하고 다니는 그 학생에게 묘하게도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남학교인지라 청소를 안 하고 도망을 가는 녀석들이 있었다. 매번 야단을 쳐도 학생들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그때 그 학생이 목소리를 높였다. "야, 오늘 청소 안하고 도망간 놈, 내일 아침 나 좀 보자." "야 임마, 아침에 보기는 뭘 봐, 너나 지각하지마." 오히려 나는 그 녀석에게 큰소리쳤다. 하지만 학생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그날부터 열심히 청소를 했다.

어느 날 퇴근을 했는데 그 학생이 급하게 전화를 했다. "선생님, ○가 다쳐서 피가 엄청 나요. 병원에 가야하는데, 구로 시장 안쪽에 있는 병원이요. 택시비도 병원비도 저희 아무것도 없어요. 혹시 지금 차 가지고 학교로 오실 수 있으세요?" 학교에서 5분 거리에 집이 있던 나는 차를 가지고 학교로 갔는데, 정작 그 녀석은 거기 없었다. 다친 학생을 싣고 병원으로 가는 내내 '시장이라 차 대기가 어려울 텐데, 큰일이네.' 계속 주차 문제에 신경을 쓰고 병원 앞에 이르니 그 녀석이 서 있었다. "선생님, 이 가게 앞에 바짝 붙여 차를 대세요. 제가 주인아저씨께 허락을 받았어요." 미리 와서 주차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던 그런 학생이었다.

"배고파서 친구들 빵이나 도시락을 훔쳐 먹기도 했어요. 솔직히 저도 공부 잘하고 싶어요. 근데 안돼요. 책을 봐도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근데 선생님들은 '하면 된다'고 하면서 공부하라고 자꾸 재촉하니까 짜증나서 대들었던 거예요. 영어나 수학만 어려운 게 아니에요. 저에게는 우리말인 국어도 너무 어려워요. 매일 50분씩 7시간을 꼬박 책상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지옥이에요."

상담할 때 그 녀석이 하던 말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그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선생님, 접니다. 헤헤, 국방부에 있어요. 대한민국 군인입니다. 잘 지내시죠?"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