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의 힘

▲ 황풍년 편집장/전라도닷컴
세상은 더욱 각박해지고, 사람이 '사람'같지 않아 보일 때가 많다. 몸서리나는 범죄행각뿐이 아니다. 이웃이나 가족에게조차 몹쓸 해코지나 패악질을 하는 패륜도 왕왕이다. 고관대작들과 엄청난 부자들이 저지르는 구리고 추잡한 짓들은 기가 막히게 한다. 대기업 총수나 부장판사의 추잡한 짓거리나 청와대 비서관, 현직 검사장, 전관예우를 받는 변호사 같은 자들의 구린내 나는 부패 스캔들이다. 겉보기엔 멀쩡하고 만인의 추앙을 받는 사람들이다. 막대한 혈세를 들인 구조조정도 알고 보면 제 배만 불리는 도적들에게 칼자루를 쥐어주는 꼴이다.

답답하고 우울해진다. 도대체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진 사람들의 끝없는 탐욕과 일탈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똑 부러진 정답은 만무하나, 시골 어르신들의 말씀에 화들짝 놀라며 어림짐작을 한다.

"우리 손지가 공부허고 있으문 내가 말해. 아가! 공부 많이 헌것들이 다 도둑놈 되드라. 맘 공부를 해야 헌다. 인간 공부를 해야 헌다 그러고 말해."

이런 할매도 있는가 보다. 공부하는 손자를 기특해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야 할 판에 오히려 얄궂게 다그치는 경우라니…. 순천 송광면에서 전라도닷컴이 만난 할매다.

천하에 못된 인간들의 이면(裏面)을 들춰보면 늘 할매 말씀이 떠오른다. 예를 들자면 일제강점기의 친일 앞잡이들, 독재정권의 주구들, 요즘 검은돈 뭉치로 주고받는 큰 도둑들의 면면을 보면 할 수 있다. 대학 안 나온 이 드물고 '공부' 많이 하지 않은 이가 거의 없다.

하여 할매 말씀은 만고풍상을 몸소 겪은 경험에서 산출된 믿을만한 통계치인 셈이다. 그리고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자' 같은 '가짜 공부'가 아니라 '맘공부' '사람공부'를 으뜸으로 해야 한다는 금과옥조다. 자식을 가진 모든 부모와 교육 현장의 교사들이 한번쯤 곱씹어 흉중에 새길 만하다.

공교육이란 국가나 공공 단체가 행하는 교육을 말한다. 그러나 교육을 담당한 기관이나 주체가 누구냐가 아니라, 교육의 중심 내용, 지향하는 바가 공적이어야 공교육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이나 사법인이 행하는 교육이 모두 사교육일 순 없다.

"친구도 경쟁자다"며 시험공부만 독려하는 교사보다는 '인간 공부'를 설파하는 할매의 가르침이 진짜 공교육인 거다. 흔히 넘쳐나는 사교육으로 인해 공교육이 위기라고들 한다. 이 또한 해석을 달리하면, 학교 안팎을 막론하고 '더불어 사는 법'에 대한 가르침의 실종을 말한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그저 학생이란 공부 잘해서 성적 잘 받고 대학 가면 그게 최선'이라고 독려하는 사회에서 공교육은 씨가 말라버린 셈이다.

우리 아이들은 당장엔 '사람의 도리'는 하지 않아도 된다. 설날 세배를 가지 않아도 되고, 피붙이의 흉사에 문상이 면제되고, 친구에게 병문안을 갈 짬이 없어도 '괜찮다!'다. 같은 학교에 입학했지만 성적에 따라 편을 갈라 졸업 때까지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다. 태생과 환경에 따라 천차만별의 인격체들이 청소년기에 서로 섞여 소통하고 미래에 한데 어울려 살아갈 공동체를 미리 학습하는 장이 되지 못한다.

"단 한 순간도 동요할 틈이 없다. 더 열심히 공부하는 게 선생님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몇 해 전, 졸지에 담임교사를 잃은 학생들을 문상도 못하게 하고 붙잡아 놓았다는 한 고등학교의 이야기다. 학교가 전쟁터고 학생이 군인이 아닌 바에야, 어찌 스승의 비극적 죽음에 동요하지 않고 태연하게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으랴. 이런 게 공교육의 끔찍한 실태다.

간혹 이런 생각을 해본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그것 자체로 보상을 받고 행복할 터이니, 우등상을 아예 없애면 좋겠다. 대신 선행상, 효행상, 봉사상, 청소상 같은 것만 주면 어떨까? 언제나 타인을 위해 노력하는 학생들을 최고로 치는 풍토를 만들면 어떨까? '맘 공부', '사람 공부'가 펄펄 살아있는 진짜배기 공교육이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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