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도광 교무/공군사관학교, 성무교당
예전에 어느 TV 예능프로그램을 보았다. 눈을 가리고 헬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는 미션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헬기에서 뛰어 내린다는 미션은 게스트를 속이기 위한 거짓이었다. 실제로는 헬기를 가장한 승합차에 태워 큰 선풍기로 바람을 일으키며 쿠션이 깔린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승합차에 올라 탄 게스트는 정말 헬기에 탄 것처럼 공포에 휩싸인 상태였다. 몇 번의 뛰어내리라는 지시에도 겁에 질려 뛰어내리지 못하다가 마지막에 비명을 지르며 뛰어내렸다.

바닥에 착지한 게스트는 눈을 가린 안대를 벗고 보니 자신이 헬기에서 뛰어내린 것이 아니었다는 것에 큰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이 자기를 속이기 위한 미션이라는 것을 알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품어냈다.

어느 누구든지 이렇게 볼 수 없는 상황에서라면 상상 속의 그림들을 현실처럼 느끼는 착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눈을 감지 않고도 이런 착각에 빠지는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볼 때 무언가의 행동을 해도 다 좋아 보이고, 보통사람들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경우에도 그게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고 오히려 좋아 보이는 경험을 해 본적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사랑에 눈이 멀었다'고 하고, '콩깍지가 씌다'고 이야기 한다. 이것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앞이 가리어 사물을 정확하게 보지 못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어느 상대의 장점만 보이고, 단점도 장점으로 보이고, 평범한 것도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한편으로 집착하는 우리들의 분별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 마음을 '착심'이라고 한다. 이 착심은 공부인에게 있어 매우 큰 경계로 이것을 떼지 못하면 생활에 습이 돼 죄업의 바다에 빠지게 된다.

소태산 대종사는 "사람이 평소에 착 없는 공부를 많이 익히고 닦을지니 재·색·명리와 처자와 권속이며, 의·식·주 등에 착심이 많은 사람은 그것이 자기 앞에서 없어지면 그 괴로움과 근심이 보통에 비하여 훨씬 더 할 것이라, 곧 현실의 지옥 생활이며 죽어갈 때에도 또한 그 착심에 끌리어 자유를 얻지 못하고 죄업의 바다에 빠지게 되나니 이 어찌 조심할 바 아니리요"(〈대종경〉 천도품 19장)라고 법문으로 밝혔다.

이와 같이 공부가 미진한 중생들은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으므로 현실에만 쫓기는 수도 있고, 복과 죄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지 원인도 모를 수도 있다. 그러니 무명의 업력에 끌려 착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공부가 수승한 공부인들은 일심을 모으고 일원의 진리를 하나하나 알아가고, 죄와 복이 다 자기가 짓고 받는 이치를 알고 살아가기 때문에 죽을 때에도 지혜의 등불을 밝혀 청정 일념으로 길을 떠나서 탐·진·치를 항복받아 시방 삼계를 자유로 오가며 살아간다. 그래서 이 착심 떼는 공부가 생사 해탈 공부도 된다고 했다. 이 착심을 떼는 공부로는 염불과 좌선 그리고 유·무념 공부가 있다. 여름이 지나면서 무더위가 조금씩 한풀 꺾이는 요즘 아침 저녁으로 수양에 적공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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