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덕권 교도/여의도교당
'처처불상 사사불공'이라는 말이 있다. 우주 만물이 다 부처님이므로, 모든 일에 부처님께 불공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고 엄숙하게 살아가자는 뜻이다.

내가 사는 '덕산재(德山齋)'에는 많은 분들이 찾아온다. 그런데 대개는 세상살이가 어려워서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까?'하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마음으로 살면 잘 사는 것입니다"라고.

절에 모신 등상불이 부처가 아니다. 우주 삼라만상이 다 부처다. 이걸 아는 사람이 마음이 열린 사람이다. 우주 대자연은 부처님의 조화요, 부처님은 어느 곳 어느 때나 계신다. 새소리, 바람소리는 부처님의 음악이요, 산과 들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들은 부처님의 즐거운 웃음소리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도 다 부처님의 형상 아닌 것이 없다. 집을 지키는 개나 짐을 끄는 소도 부처님이요, 일하는 농부와 물건 파는 장사꾼도 다 부처님이다. 불공은 부처님을 숭배하고 복을 비는 일이다. 지혜의 눈이 열린 사람은 세상 만물이 다 부처님인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삼라만상을 다 부처님으로 알고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당하는 일마다 불공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사사불공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항상 부처님을 발견하여 걸음걸음이 불공하듯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나날이 새로워지는 생활이요,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부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이며, 혜복을 아울러 닦아 가는 생활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을 멀리서 찾으려 할 것이 아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다 부처님으로 알아서 공경하고 불공하면 된다.

부모에게는 자식이 부처님이요 자식에게는 부모가 부처님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식 부처님에게 불공 잘 하는 것보다 더 큰 불공이 없고,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모 부처님에게 불공 잘 하는 것보다 더 큰 불공이 없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일은 지금 하고 있는 바로 그 일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또한 제일 중요한 시간은 지금 바로 이 순간이요.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일인 것이다. 따라서 일하고 놀고, 가고 오고, 말하고 먹는 것 모두가 불공이다.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생활을 하는 사람은 우주 만물을 사랑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어느 한 물건도 미워하거나 함부로 죽이지 못한다. 우주 만물이 모두 다 부처님이라 공경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곧 우주 만물을 사랑하기 때문에 상생상화의 기운이 자라게 되고 상생선연을 맺게 되는 것이다.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생활은 경건한 생활이다.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살아가기 때문에 언어 동작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윤리 도덕의 타락이 없다. 경건한 마음으로 생활하는 것은 모든 미덕의 근본이다. 경건하고 신성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부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생활은 기도하는 생활이다. 부처님 앞에서의 생활이라 모두가 기도생활이나 진배없다.

따라서 '무시선 무처선'으로 수행 정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생활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생활이다. 이 세상의 모든 거짓 중에서 가장 큰 거짓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속이고서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생활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부처이기 때문에 남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다. 무조건 용서해주는 것이다. 남을 미워하고 욕하고 원망하다보면, 밤잠을 잘 못자고, 밥을 먹어도 소화가 잘 안 된다. 병이 드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잘못하긴 남이 잘못했는데 괴롭기는 내가 괴롭고, 병은 나한테 생기니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그렇게 말을 해 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잘못을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그렇게 쉽게 말을 하느냐고 반발을 한다. 그렇지만 생각을 한 번 해보자. 남을 용서하는데 돈이 드는가 힘이 드는가. 무엇이 그렇게 힘이 들어 어렵다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냥 무조건 용서하면 된다. 용서가 곧 제도다. 그렇다고 억지로 참으면 안 된다. 그냥 털어버리면 된다.

지금 살고 있는 것도 어차피 꿈속의 또 꿈이다. 집착할 일이 없다. 그래도 미워하는 사람이 밉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고 계속 올라오면 그 생각을 일으키는 나는 전부 잘하기만 했느냐고 스스로 되물어보자.

사람마다 부처님이 그 안에 있다. 사람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양심이 바로 부처다. 양심이 있으니까 자기가 잘못한 것은 알고, 안에 있는 부처님이 알아서 잘못을 뉘우치고, 잘해야지 하는 생각도 하게 돼 있다. 그러니 잘못하는 사람을 보면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부처님과 선지식만 스승이 아니다. 잘못하는 사람도 스승인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고 깨우치게 해주니 얼마나 큰 스승인가. 불평불만에 가득 차서 세상을 바라보면 온통 지옥이지만, 좋은 것이든 미운 것이든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면 처처가 극락이다. 내가 극락에 가고 싶으면 극락에 가도록 마음을 써야한다. 부처님한테 애걸복걸 빈다고 극락에 보내주지 않는다. 불법은 제 성품을 봐서 부처 이루고 살라는 가르침이다. 종교는 이 세상 사는데 바르게 잘 살라고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잘 살아가는 길은 '처처불상 사사불공' 곧, '곳곳이 부처요 일일마다 불공이라'는 가르침을 잘 실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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