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 교수의 현대건축이야기

   
▲ 조한 교수/홍익대학교 건축학부
 
▲ 박종철 열사 기념관.
1호선 남영역에 내리면 플랫폼 뒤쪽으로 검은색 건물이 하나 서있다. 검은 색 벽돌로 지어져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건물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계기가 된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지금은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라는 간판을 달고 있지만, 원래는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이름으로 80년대 '공포 정치'의 대명사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건물의 설계자가 건축가 김수근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건물을 둘러보면, 검은색 벽돌과 돌출창, 거대한 벽면을 파내 만든 안마당 등 당시 김수근의 건축언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 1층에서 5층까지 직통으로 연결된 원형계단까지 옛 공간사옥(현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과 닮았다. 굳이 달라 보이는 점을 찾자면, 아주 좁은 세로 창들이 늘어선 5층 정도이다. 하지만 이 건물의 반전은 바로 김수근의 건축언어가 아주 치밀하게 '고문 공간'을 위해 활용된다는 것이다.

당시 피의자들은 정문이 아닌 건물 뒤편 출입구를 통해 들어왔다고 하는데, 안으로 들어오면 층수도 붙어있지 않는 작은 승강기와 어디로 올라가는지 알 수 없는 원형 계단이 있는 공간으로 들어서게 된다. 이 승강기와 원형계단은 딱 한 층으로만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는데, 바로 '고문'이 자행되었던 5층이다. 피의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입구에서 몇 차례 구타를 당한 후 원형 계단을 통해서 올라가면, 방향감을 잃고 몇 층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원형계단은 공간을 절약하기 위해 사용되곤 하지만, 여기에서는 공포를 조장하기 위한 심리적 장치로 활용됐던 것이다. 5층으로 올라오면 복도 양쪽으로 방들이 쭉 배치되어 있고, 긴 복도 끝에는 창살로 막혀있는 작은 네모난 창 하나만 뚫려있다. 마주 보는 취조실들은 문을 엇갈리게 배치하여 문을 열었을 때 건너편 방이 보이지 않게 하였고, 모든 문을 똑같이 만들어 혹시라도 피의자가 취조실을 빠져나올 경우에도 어느 문이 밖으로 나가는 문인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면 밖에서 보았던 좁고 긴 세로창의 용도를 금방 파악할 수 있다. 머리조차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좁은 창들은 반투명한 유리로 막혀있어 세상과의 단절감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창밖으로 뛰어내려 목숨을 끊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또한 천정등을 철망으로 막아 놓는 것이나, 철제가구를 바닥에 박아 놓은 것 역시 자살을 막기 위함이다. 지금은 철제가구가 모두 없어졌지만, 옛날의 볼트 자국은 아직 선명하게 바닥에 남아있다. 내부 벽은 모두 철제 흡음제로 마감되어 있는데, 고문에 의한 비명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창 쪽에 있는 변기 역시 훤히 보이게 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어떠한 인간의 존엄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이렇게 공간이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은 많은 분들의 노력을 통해서다. 과거 경찰의 과오를 반성하는 차원에서, 5층 전체를 그대로 두기로 한 것이다. 특히 고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받은 5층 9호실에는 당시 욕조와 변기, 침대와 철제가구가 복원되어 있는데, 중앙 세면기 위에 놓여 있는 영정 사진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박종철 기념관'이 있다. 80년대 말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신문기사와 자료들을 보고 있으니, 얼마나 많은 희생을 통해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와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편에서는 문화적 선구자를 자처하며 한편에서는 이렇게 치밀한 '고문 기계'를 만드는 건축가 김수근을 보며, 단지 한 건축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고문'을 가능하게 한 우리 사회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과연 지금이 그때와 얼마나 다른지 또 한 번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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