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의 힘

▲ 황풍년 편집장/전라도닷컴
성씨의 유래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면 한반도 바깥에서 이주한 귀화 성씨가 상당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대부분 중국에서 건너온 성(姓)이다.

"전국시대 전쟁을 피해 일족이 배를 타고 동쪽으로 이동하다 한반도 바닷가 어느 지역에 터를 잡았다. 이 유민은 세 명의 형제가 이끌었는데 둘째와 셋째는 다시 육지 깊숙한 곳으로 가족과 함께 들어가니 하나의 성(姓)에서 세 개의 본(本)이 생겨나 오늘날에 이르렀다."

조상의 기원을 중국에 둔 이런 기록은 단지 기록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과 중국의 후손들이 국가를 초월해 문중을 형성하고 혈연으로 교류하고 있기도 하다. 공자와 맹자의 자손임을 자랑스레 여기며 이 땅의 국민으로 일가를 이루고 있는 것도 그 사례다. 무수한 왕조의 부침과 대규모 이주가 끊이지 않았던 역사, 숱한 외침의 결과를 보더라도 우리가 한 조상을 둔 단일민족일 수 없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대부분은 하나의 조상을 뿌리로 수 천 년을 한겨레로 이어왔다는 순혈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단군을 시조로 남북을 통틀어 7천만 겨레가 하나의 혈통이라는 믿음이다.

하지만 귀화 성씨가 아닌 토박이 성씨라 하더라도 시조의 기원을 단군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성씨의 형성과 보학의 출현이 고조선으로부터 수 천 년이 흐른 후대이기도 하려니와 단일민족에 찍힌 방점이란 길게 잡아도 한 세기 내외인 탓이다.

단일민족주의는 그것이 강조되는 시대상황과 종교나 사상, 정치적 의도 등에서 기원을 찾아야 한다. 민족주의가 한 시대의 정신적 지주가 된 배경을 토대로 단일민족의 도그마와 그 환상이 남겨둔 폐해를 되짚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단일민족이란 필연적으로 타민족에게 배타적이다. 그 배타성은 자민족 우월의식이며 타민족에 대한 적대와 차별, 나아가 탄압과 전쟁을 불러온다. 나치 독일의 게르만주의나 일본의 황국신민의식이 현대사의 비극을 초래한 연유다. 또 중국 한족들이 취해 온 남만북적 동이서융의 사상 역시 이민족에 대한 탄압과 정벌의 역사에 이바지했다. 미국 내 흑백갈등과 호주의 백호주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내전 또한 인류의 평화와 상생을 파괴하는 인종주의, 순혈주의에서 비롯되었음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우리 역사에서 일제 강점기의 시대정신이 바로 민족주의다. 나치나 일본과는 정반대로 독립과 평화를 향한 불굴의 의지로서 단일민족의 가치는 빛났다. 일제의 차별과 억압, 착취로부터 벗어나려는 저항정신의 밑바탕에 단군의 자손, 단일민족이 깔렸다. 우리의 민족주의는 이렇게 정당한 저항에서 출발했다. 또 일제 때 미국과 남미, 만주와 구소련으로 뿔뿔이 흩어진 동포들이 이주지의 혹독한 민족주의에 맞서 우리말과 문화를 지켜온 눈물겨운 끌텅이었다.

다른 민족을 정복하고 학살하던 정복자의 민족주의든 그에 맞선 피정복자의 민족주의든 제국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소멸되어야 할 유산이다. 하지만 그 잔재는 세계 각 국에 여전히 남아 분쟁의 불씨가 되고 끊임없는 국지전과 테러를 유발하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일본 민족주의의 최대 피해자였던 우리의 저항적 민족주의가 배타적으로 변질돼 오늘날 이주노동자나 결혼이주여성들의 삶을 압박하는 사례다. 피부색과 언어, 문화가 다른 이웃을 포용하지 못하는 턱없는 순혈주의의 후유증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가 통절한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고 있다는 반증이며 아직도 세계 각국에서 스스로의 인권을 신장하고 우리 문화의 독자성을 존중받으려는 한국인 이민자들에 대한 배신행위라 할 수 있다.

아시아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 이주여성들은 엄연히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다. 이미 '우리' 안에 있다. 그들의 존재는 한국 사회의 절박한 수요와도 닿아 있다. 그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문화를 포용하는 일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야 우리 사회의 문화 다양성과 조화로운 행복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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