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자의 삶

▲ 최대규 원무/어양교당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큰 도에 발원한 사람은 짧은 시일에 속히 이루기를 바라지 말라. 잦은 걸음으로는 먼 길을 걷지 못하고, 조급한 마음으로는 큰 도를 이루기 어렵나니, 저 큰 나무도 작은 싹이 썩지 않고 여러 해 큰 결과요, 불보살도 처음 발원을 퇴전(退轉)하지 않고 오래오래 공을 쌓은 결과이니라(〈대종경〉 요훈품10)."

살아가면서 작은 힘이지만 만나는 인연들마다 원불교를 소개하고 불문에 귀의하도록 안내하며,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다 원무로서 가졌던 사명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어쩌면 이러한 나의 역할과 사명이 수십년 또는 한평생을 오롯히 신앙하고 적공한 여러 선진들과 선배들에 비하면 매우 작고 하찮은 새싹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때마다 '원무'에 대한 소명의식은 조금씩 깊어져가고 있다.

"원불교와 불교는 어떻게 다른가요?"

원불교를 잘 모르는 이들이 물어오는 질문들 가운데 하나다. 원무지만 아직 명쾌한 답을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 배우고 나름 열심히 공부한 바에 따라 최선을 다해 설명하면 환하게 웃는 인연들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끼곤 한다. 어설프지만 나로 인해 저들이 원불교에 한발짝 다가갈 수 있고, 또 저들의 삶에서 혜복이 넘쳐날 수 있도록 안내한 것 같아서다.

특히 직장이 원불교가 모태이다 보니 거래 하는 분들도 자주 '원불교'에 대해 물어보곤 한다. 또한 감독 기관이나 유관기관에 근무하는 분들도 종종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전에는 그런 질문에 늘 쑥스럽게 웃기만 했는데 요즘은 설명하려고 애쓰는 나를 보는 것도 어느새 작은 즐거움이 됐다.

백척간두진일보. 백 자나 되는 높은 장대 위에 다달아 또 한걸음 더 내딛는다는 의미로, 나에게는 내가 가진 틀과 아상(我想)을 버리고 나아가라는 뜻처럼 들린다. 내가 가진 선입견과 그동안 쌓아온 지식들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내게 있지 않은 것보다 이미 가진 것들에 대해 감사하고 만족하도록 마음을 돌리는 일도 생각보다 녹록한 일은 아님을 알았다.

생각해보건대 내가 하고 있는 이러한 일들이 아직은 덜 익고 부족하지만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원무이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를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는지 조용히 자문해본다. 굳이 '자신성업봉찬'이라는 어마어마한 목표가 아니더라도 내가 조금이라도 원불교의 법과 대종사의 말씀 속에서 변화할 수 있고 변화되고 있다는 것이 오늘도 나로 하여금 웃음 짓게 한다.

내 육신은 영원하지 않다. 언젠가는 멸하고 다른 모습으로 또 다른 삶을 살게 되겠지.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매 순간 삶을 살아가면서 마치 영원할 것처럼 애착과 탐착을 가지고 살아가는 날들이 많았었다. 인연들과의 관계 속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나를 바라볼 수 있고 취사를 할 때 좀 더 객관적으로 처리를 할 수 있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도 정말 기쁜 일이다.

이제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보다는 그 동안 해왔던 것들을 꾸준히 해내고 싶다. 만나는 인연들마다 원불교와 대종사님 말씀 전하는 일, 내 자신의 잘못된 습관과 틀을 깨뜨리는 일,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것들과 내게 있는 것들에 대해 감사하기 등을 말이다.

대종사가 일러 준대로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으로 내 삶을 채워가고 싶다. '좀 더 자주, 좀 더 많이, 좀 더 오래'를 표준으로 앞으로도 원무 역할을 지속해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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