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빛내는 정전

▲ 김준영 교무/벤쿠버교당
들여다보면 집집마다 사연 없는 집이 없습니다. 가족의 건강, 경제고, 부부나 부모 자녀간의 갈등, 자녀들의 학업이나 취업, 결혼, 출산 등 애로 없는 집이 없죠. 하지만 사람마다 그 직면하고 겪어내는 태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소연만 하는 사람, 괴로워만 하는 사람, 달아나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일말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안분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죠.

실제 필요한 것은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그에 상응한 조처를 취하는 것입니다. 제일 확실한 방법은 그 문제의 근본을 해결하는 거죠. 하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찾게 됩니다. 내 힘만으로 되지 않으니, 도움의 손길을 청하는 거죠. 하나님이나 예수님, 부처님을 찾게 됩니다. 원불교에서는 '법신불 사은님'을 찾죠. 그 형체를 알 수 없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모습으로 늘 우리에게 은혜를 주는 부처님 말입니다. 그 부처님은 우리의 많은 말들과 그 말로 인해 규정지어진 모든 개념들의 길이 뚝 끊어져버린 그 자리 그 상태로 직접 경험할 수도 있고, 우리 앞에 펼쳐진 무궁무진한 세상, 우리가 경험하고 관계하는 그 모든 것,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작용하는 모든 이치를 아우르는 바로 그 자체입니다.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죠. 그래서 대종사님은 '일원상'을 택하셨습니다. 법신불이면서 사은인, 근원으로 보면 법신불이고 그 작용과 현상으로 보면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사은인 그 어떤 대상을 '법신불 일원상'으로 표현한 거죠. 그래서 우리는 이 '법신불 일원상'을 통해 '법신불 사은'을 믿고 닮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도움의 손길을 청할 때에는 이 법신불 사은을 믿고 정성을 드리며 빌죠. 이렇게 믿고 원하는 바를 빌며 정성을 바치는 행위를 불공(佛供)이라고 합니다. 과거 불교에서는 불보살 전에 공양을 올리며 정성을 바쳤기 때문이죠.

원불교에서도 죄를 사하고, 복을 구하는 등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불공을 드립니다. 불공을 '법신불 사은'에 드리죠. '법신불 사은 부처님'을 찾다보니, 세상에 부처 아님이 없고 부처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원불교 불공은 진리불공과 당처불공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진리불공이란 전체를 아우르는 법신불 전에 모든 것을 비는 것이고, 당처불공은 그 직접적인 사은 당처에 부처님께 불공하듯이 정성을 바치고 위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천지에게 당한 죄복은 천지에게, 부모에게 당한 죄복은 부모에게, 동포에게 당한 죄복은 동포에게, 법률에게 당한 죄복은 법률에게 직접 비는 것으로 사실적인 동시에 반드시 성공하는 불공법'이기 때문이죠.

'그 기한에 있어서도 막연히 한정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의 성질을 따라 적당한 기간으로 불공'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고 있는 현안을 해결하고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려울 때만 진리 전에만 매달려서 될 일이 아니고, 평소에 당하는 처소마다 만나는 인연마다 그 일의 성질에 맞게 실질적인 정성을 들이는 당처불공을 병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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