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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당을 찾아서/ 80년 세월 지켜온 대각전 범종소리
교당을 찾아서/ 80년 세월 지켜온 대각전 범종소리
  • 강법진 기자
  • 승인 2016.09.23
  • 호수 18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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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교구 신흥교당
▲ 원기21년에 설립한 신흥교당 대각전. 당시 초가지붕은 함석으로 개량했고 군데군데 보수했으나 그 원형은 잘 보존돼 있어 근대문화유산으로서 가치를 담고 있다.

더위를 씻겨주는 하늬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9월 초하룻날,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 신흥교당을 찾았다. 소태산 대종사 당대의 삼순일(매월 1일, 11일, 21일) 법회를 유지하고 있는 이곳은 오전9시 정례법회를 앞두고 교도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바쁜 농사철인데도 말끔한 옷차림으로 법당에 들어선 교도들은 반가움에 얼굴 가득 함박꽃이 핀다. 70~80대 어르신들은 얼핏 셈해 봐도 수십 년 지기 법동지들, 그 만남엔 뭔가 특별함이 있다.

신흥마을은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야트막한 산 아래에 10여 가구가 옹기종기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하지만 예로부터 교도 아닌 집이 없고, 80여 명의 전무출신이 배출된 곳이다.

3년 전, 자신이 나고 자란 이곳에 이호인 교무가 부임하면서 소리 없는 변화가 일고 있었다. 그 시작은 잃어버린 신흥교당의 옛 이름을 찾는 일이었다.

다시 찾은 이름, 신흥교당

원기91년 신흥교당은 교단 정책에 의해 인근 왕촌·묘량교당과 더불어 '묘량지역 교화공동체'로 통합됐다. 신흥교당에서 법회를 보긴 했지만 소태산 대종사 당대에 세워진 신흥출장소(신흥교당 전신)의 명성을 잃어버린 채 10년 가까이 지냈다.

부임 후,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이 교무는 "신흥출장소는 원기9년 불법연구회가 창립한 후, 영산과 경성에 이어 세 번째로 설립된 지방회관(교당)이다. 또한 소태산 대종사가 3번이나 다녀간 성적지이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그는 "신흥교당 창립사는 곧 초기교단사이다"며 "원기5년 이동안 선진의 제안으로 이곳에 '묘량수신조합'이 태동했다. 묘량수신조합은 영산 방언조합의 조직과 형식을 그대로 이어받아 지역사회를 변화시킨 성공적 모델이다"며 신흥교당의 역사를 짚었다. 그 중요성은 교단사적으로나 한국사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켜 당시 10대 일간지에 그 활동이 소개되고, 5번이나 수상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작은 시골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행보를 보인 이곳의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역사를 덮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일산 이재철 선진과 이동안 선진, 이형국 선진 등이 배출된 신흥교당의 출발은 묘량수신조합이었다. 마을사람들이 모두 조합원이 되어 지역발전을 도왔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학을 열어 문맹을 깨치고, 이흥과원을 통해 영육쌍전의 정신을 길러 불법연구회 살림을 도왔다. 영산 방언조합의 꿈이 이곳 신흥에 와서야 꽃을 피운 셈이다. 마을 전체가 원불교 일원가정일 수밖에 없는 이곳. 이 교무가 지키고 싶었던 건 마을이름만큼이나 소중했던 공동체의식이며, 교화를 다시 한 번 일으킬 동력이었다. 그의 제안에 지난해 1월 신흥교당은 제 이름을 찾았다.

대각전, 근대문화유산 등록 추진

한 일을 지내고 나면, 또 다른 과제가 몰려왔다. 8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신흥교당 대각전 건물을 문화재청에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시키는 일이 이 교무에게는 급선무였다. 이 일은 신흥교당 대각전을 통해 원불교의 공동체·계몽운동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했다.

이 교무가 한 뭉치의 자료를 들고 나왔다. 문화재청에 제출하기 위해 그동안 수집하고 자문을 얻어 정리한 자료들이다. 그는 "신흥교당 대각전은 대종사 당대에 지어진 법당 그대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역사적 건물이다"며 "초가지붕을 함석으로 개량하고, 원형을 훼손하지 않은 채 군데군데 보수만 했다"고 덧붙였다.

신흥교당 대각전은 원기21년 목조 초가 5칸을 교도들의 힘으로 건축했다. 그 전에는 이형국(이동안 동생)이 희사한 목조 초가 본채(8칸), 행랑채(4칸)을 회관삼아 공부방과 작업장으로 사용했다.

박경조 교도가 젊은 시절 대각전의 풍경을 전한다. 그는 "새해가 되면 어르신 아이들 할 것 없이 모두 대각전에 모여 세배를 하고, 집집마다 음식을 가져와 나눠 먹었다. 야학이 열리면 밤새 책 읽는 소리에 마을에 활기가 돋고, 울력이나 공동작업이 있으면 서로 손을 보탰다"고 마을의 미덕을 전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교도들도 추억담을 하나둘 쏟아낸다. 일생을 욕은 커녕 반말도 할 줄 모르고 살았다는 교도, 인사는 무조건 합장하고 하는 줄 알았다는 교도,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법명만 불려 중학교에 가서야 호적명을 찾았다는 교도 등 이들의 추억담은 하나같이 마을과 닮아 있었다.

그 세월이 벌써 80년. 외형은 낡았지만 그 가치는 더욱 드러나게 된 대각전은 원광대학교 박윤철 교무, 김희태 전남 상근문화재전문위원 등이 근대문화유산 등록 작업을 돕고 있다. 김희태 전문위원은 대각전의 가치에 대해 "영광에서 발흥한 민족종교 원불교의 초기 종교공간으로서의 원형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 보존해 온 점과 일원상, 오르간, 북, 종, 촛대, 액자 등 그 당시 상징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보았다.

신흥교당 대각전은 현재 문화재청에 자료를 제출하고 실사까지 마쳤다. 이 교무에게는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 법회를 마치고 교도들을 배웅하는 이호인 교무.

안산선방에서 세계명상센터로

이 교무가 교당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안산선방'을 소개했다. 지난해 말, 완성한 안산선방은 3칸짜리 작은 황토집이었다. 방 안에는 아무것도 비치돼 있지 않다. 그저 쉼과 비움이 필요한 이에게 언제든 방을 내어준다는 마음으로 지었기 때문이다. 이 교무는 "종교를 떠나 누구든 조용히 쉬고 싶거나 기도나 선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와서 머물다 가는 곳이다. 교도들도 너무 좋아한다"며 "나의 꿈은 신흥마을을 세계적 명상센터가 자리한 수양공동체 마을로 만드는 것이다"고 포부를 밝혔다. 또한 그는 "안산선방은 내가 태어난 곳이다. 이 집터를 가족들이 기쁘게 희사해 꿈을 이룰 수 있었다"고 살짝 귀띔해준다.

오래전부터 세계명상센터 건립을 서원했던 그에게 고향은 최고의 적지였다. 원기14년 소태산 대종사가 처음 신흥출장소를 방문했을 때다.

이흥과원이 위치한 신천리 3층 석탑(국가지정 보물 제504호) 앞에 서서 "여기가 수양 터로 쓰겠다"고 한 뜻이 그에게는 크게 다가왔다. 신흥교당 모태가 된 묘량수신조합의 주 활동 무대 이흥과원, 그의 염원대로라면 지금의 야생 녹차밭과 오디나무밭을 잘 가꿔 명상센터로 만드는 일이 과제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겠다는 그. 조금 늦더라도, 설사 운이 다해 이루지 못하더라도 하나씩 하나씩 제대로 갖춰가고 싶은 그의 마음이다.

울력하는 마을, 정다운 이웃

신흥마을은 매월 초하룻날 항상 울력을 한다. 이날도 그랬나보다. 법회를 마치고 옹기종기 앉아 울력한 이야기로 한참을 떠들던 교도들이 교무가 끓여준 단호박죽 한 그릇에 배를 채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80년 동안 이들을 지켜온 대각전 범종소리가 잔잔한 울림으로 이들을 배웅한다. "친구여, 또 봅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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