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자의 삶

▲ 권덕천 덕무 / 영산식품
중앙교구 사무국에서 유지재단 업무와 함께 중앙교구 봉공회도 함께 담당했다. 봉공회의 주요 행사 가운데 하나인 보은장터는 처음에 원광대학교 문화체육관 앞에서 했는데 여러 가지 여건이 안좋았다. 장소가 협소한데다 각종 주차 문제 등으로 학교측에서도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문득 떠오른 장소가 중앙총부 제2주차장이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그곳은 황무지에 불과했다. 풀만 자라고 관리가 거의 이뤄지지 않아 사용이 불가능했다. 그런 곳에 보은장터 행사를 하기 위해서는 자갈부터 깔아야 했다. 당시 교구장이었던 김현 교무님에게 말씀드리니 '좋은 생각이다'며 승낙해 주셨다. 주차장 바닥을 트럭 이십 여대분의 자갈과 모래로 깔아야 했다. 처음에는 덤프트럭 20대 정도면 되겠다 싶었는데 착수하고 보니 턱없이 부족했다. 53대분의 자갈을 깔았다. 이렇게 자갈을 깔고 땅을 메우고 보니 보은장터 하기에 괜찮은 지대가 됐다.

산 넘어 산이라고 해야 할까? 보은장터 땅이 마련됐지만, 매년마다 보은장터 시기에는 태풍이 온다. 원광대에서 행사를 치를때도 비바람으로 늘 노심초사했는데, 땅을 옮겼다고 하늘까지 옮겨놓을 수는 없나보다. 장터를 위한 부스를 설치하기로 한 날인데 태풍 영향으로 비가 억수처럼 쏟아졌다. 내일까지 설치를 끝내야 하는데 큰일이었다. 새벽에 일어나봐도 비는 좀처럼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다. '반드시 오늘까지 부스설치를 마쳐야 하니 법신불 사은님 도와주십시오.' 그런데 8시쯤 되니 비가 개기 시작했다. 기도에 대한 체험과 위력을 느끼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그날 장터 천막 작업을 잘 마칠 수 있었다.

봉공회를 담당하다보니 임원훈련도 함께하게 된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소록도 자원봉사를 갔던 때다. 소록도교당을 통해 몇 가정 환우들에게 가서 봉공회에서 준비한 것들을 갖다주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소록도에 처음 갔는데 마침 소록도 교당 교무의 지인 부탁으로 천도재를 지내는 것을 보게 됐다. 소록도 환우들을 만나고 그 처지를 알게 되고 난 후라서 그런지 개를 위한 천도재는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소록도 환우들은 이 병을 가지면 3번 죽는다고 표현한다. 처음 병을 앓았을 때 죽고, 가족들에게 버림받아 죽고, 그 병으로 죽음을 맞이할 때 죽는다는 것이다. 가족에게조차 버림받는 처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사람대접도 받지 못한 곳도 있는데, 짐승인 개가 천도재를 받는다니 나에게는 참 씁쓸함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그 사람들은 과연 어떤 인과를 지었길래 저런 병과 몸을 받고 모두에게 버림 받았으며, 그 개는 어떤 인과를 지었길래 천도재를 정성스레 받을까 하고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인과에 대해 더 깊게 공부하는 계기가 됐다.

봉공회 담당을 하면서 무엇보다 나에게 많은 깨침을 준 것은 봉공회 임원들이다. 각 교당의 회장들인데 한번씩 '그 분들은 무엇이 부족해서 여기서 이렇게 고생을 사서 하실까?'생각이 든다. 그럴 정도로 교구의 온갖 궂은일은 도맡아 다 한다. 온갖 고생은 다 하면서도 때로는 주위에서 안 좋은 소리를 듣는 경우도 있지만 늘상 주인의식으로 씩씩하고 부지런하게 그냥 하는 모습들을 보면 '아! 저것이 바로 무아봉공이구나'라는 무언의 메아리가 가슴에 울리곤 한다.

그 분들하고 함께 봉공하다보면 제일 기분 좋은 게 나였음을 알았다. 그 사람을 위해서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위로받는 것은 나였다. '봉사는 남을 위한 게 아니라 결국 나를 위한 것이었구나.' 중앙교구에서 7년동안 근무하면서 느낀 소득과 보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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