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현 교사 / 거창대성고등학교
1학년 백준수 학생이 마음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샘, 제가 보기는 안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샘이 엄청 무서운 분이라고 하던데요." 친구들 시선이 자기에게 쏠리자 신이 났는지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그때는 도망가지 못하게 학생들을 국기봉에 메달아 놓고 때리고, 의자에 묶어놓고 때리고, 창틀에 목을 끼워놓고 때렸다면서요?" 나는 그런 적도 없고 기억도 없지만 언젠가 선배들을 통해서 들었던 우리학교 선생님들의 무용담이 어느덧 나의 전설로 되어 버렸음을 느꼈다.

"아! 이렇게 전설은 진화하는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준수가 한마디 덧붙었다. "샘, 별명이 '사이코'와 '미친개'였다고 하던데요?"라고 말하고는 갑자기 싸늘해진 공기를 의식하면서 내 눈을 보면서 말을 살짝 내려놓는다.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웃으면서 "그래? 그런 샘이 이렇게 변했으니 마음공부가 진짜 대단하제?"라고 말하니 학생들은 재미있다고 박수를 치며 난리다.

사립학교 교직생활 30년이 되고 보니 제자들의 자식이 또 제자가 되어 들어온다. 자기 아버지에게 들었던 성질 더러운 선생님이 이젠 더 이상 무섭지 않다는 확신이 생겨서 말을 꺼냈던 것이다.

고등학교에 처음 부임하면서 같은 재단의 중학교에서 연극을 하는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연극에 완전 빠져버렸다. 미술수업을 하면서 한 달에 세 번 이상 서울이나 대구에서 그룹전시도 하고 지역 문화제와 예술제 일에 관여해 바쁘게 뛰어다녔다. 지금의 거창국제연극제를 만들어 나가며 학교 연극반 지도도 했다. 이 과정에서 성격이 예민하고 다혈질인 나는 학생들을 잘 대해 주다가도 욱하는 성질이 폭발했고 학생부 학생지도 선생으로서 특히, 예의가 없거나 거짓말을 하는 학생은 지도를 하다가 화가 폭발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이동을 한 어느 날이었다.

미술 대회를 마치고 담당 선생님들과 저녁을 먹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백승민 아버지인데 저녁에 좀 만나자고 한다. 약속 장소에 가니 승민 부모님이 어서 오라며 앞자리를 권했다. 테이블 위에는 맥주 두 병과 안주가 접시에 담겨 있고 잔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자리에 앉으니 승민 아버지는 맥주를 따르고는 "아를 와 때렸어요? 있는 대로 말씀 한 번 해 주이소" 한다. 아이의 잘못을 이야기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아이를 때려서 미안하다는 말도 하기 싫어서 잔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맥주잔이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니 뒤쪽 벽에서 맥주잔이 박살이 났다. 옆에 있던 승민 어머니가 울먹이며 말리자 승민 아버지는 참는 듯이 숨을 한 번 고르고 나를 바라본다. 잔을 들으라고 권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인상이 변한다. 그 순간 내 앞에 있던 맥주잔이 날아온다. 다시 몸을 숙여 피하는데 이번에는 안주 접시를 들고 사정없이 내 머리를 내려쳤다. 머리에 접시가 깨지면서 코를 스친 것 같은데 따끔했다. 멱살을 잡으려하는 손을 내가 뿌리쳤고 옆에 있던 승민 어머니가 앞으로 끼어들어 말렸다. 술집 주인이 승민 아버지를 뒤에서 끌어안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저 자식은 선생 아니니 죽여도 된다"는 말이 꿈결같이 아련히 멀어져가고 있다.

승민 아버지는 아들이 눈이 작고 찢어진 것이 남에게 미움을 받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침 조회시간에 담임선생에게 맞았다고 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화가 풀리니 그는 순한 양이 됐다. 피로 얼룩진 내 얼굴을 휴지로 닦아주며 미안하다고 수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자식에 대한 염려와 서로의 성질에 대한 연민과 걱정으로 의기투합이 됐다. 맥주 한 박스를 둘이서 비우고 승민이를 잘 키우자며 안고 서로의 등을 토닥이며 헤어졌다. 그동안 많은 학생과 학부형과의 다툼에 마지막을 고하는 날이 됐다.

이후 바로 원불교를 만나게 되었고 일상수행 요법 '원래는 없건마는, 있어지나니…' 는 내가 부처로 가는 소식이었다. 마음을 돌리니 나와 다른 사람을 모두 태워버렸던 화는 분발심으로 변했다. 믿음은 자비와 서원이 되어 지금은 원무로 활동하고 있다.

성품이 공하여 어떤 것도 아니지만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부처, 원무, 선생님, 사람은 이름일 뿐이다. 한 생각에 주착되면 언제든지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산다. 승민 아버지 덕분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