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곤 ACRP(사진 맨 왼쪽) 서울평화교육센터 이사장이 23일 국제마음훈련원에서 진행한 범종단 '답게 살겠습니다' 대토론회에서 운동의 가치에 대해 기조강연했다.
범종단 '답게 살겠습니다'운동 대토론회
김성곤 ACRP 서울평화교육센터 이사장
기조강연, '아름다운 삶'주제로 운동 격려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의 '답지' 않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총체적 부실의 결과였다. 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답게'만 행동했어도 304명 안타까운 생명이 몰살당하는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KCRP 평신도들이 주축이 돼 출범한 범종단 '답게 살겠습니다' 운동은 우리 사회가 거는 기대가 크다. '-답다'라는 어원이 갖는 의미와 사회적 가치를 짚어보며 이를 통해 종교인들이 실현하고자 하는 이 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답다'의 의미
우리말의 '답다'는 명사 뒤에 붙는 접미사로 '그 명사가 갖고 있는 특성이나 성질을 제대로 발휘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남자답다' '여자답다' '군인답다'는 각기 그 특성을 잘 나타내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고 이는 누가 특별히 가르치지 않아도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선험적 혹은 경험적으로 갖고 있는 이미지다.

그런데 우리말에 '아름답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아름다움'은 어떤 대상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아름답다'라는 생각이 나며 마음이 끌리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단지 여성의 아름다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음악이나 경치, 마음, 인생을 볼 때 우리는 절로 감탄하거나 눈물까지 흘리게 된다. 아름다움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우리의 마음을 끄는 힘이 있으며 인간은 누구나 추함 대신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럼 '아름'이란 말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사전적으로는 '두 팔을 둥글게 모아 만든 둘레' 즉 둥근 원(圓)을 의미하고 있다. 그럼 '아름답다'의 '아름'과 (원불교에서 진리의 상징으로 섬기는) 일원상(一圓相)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사실 원(圓)은 수천 년 전부터 고대 인도에서 진리 혹은 깨달음의 상징으로 형상화되어 왔다.

북송의 성리학자 주돈이(1017~1073)의 태극도설에 의하면 우주의 만물이 무극(無極)에서 나오고 이 무극에서 음양이 분리되어 태극(太極)이 되며, 여기서 5행과의 상호 작용에 의해 만물이 태어난다고 말한다. 따라서 필자는 '아름답다'의 '아름'이 만물의 원형으로서 '무극, 태극' 혹은 '이데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물이 아름다운 것은 이미 우리의 영혼 속에 선험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우주의 원형, 이데아와 닮았기 때문이다.

이데아의 의미

플라톤의 '이데아'(idea)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사물의 본질적인 원형으로서,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되는 초월적 실재이다. 현실 사물들은 끊임없이 변하는데 반해 이데아는 불변하며 항구적이다. 따라서 이데아야말로 참된 존재이며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고 우리의 영혼 속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인 것이다.

우리가 '-답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만물의 원형, 이데아를 '닮는' 것이다. 즉 남성의 이데아를 닮으면 남성답다, 여성의 이데아를 닮으면 여성답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데아는 추상적 관념으로 존재하지만, 현실세계에서는 구체적 화현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미녀는 크레오파트라, 군인은 이순신, 임금은 세종대왕, 대통령은 링컨, 성직자는 마더 테레사 등이라 할 수 있다. 이데아라는 것도 우리의 영혼 속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이성과 같은 것이다.

정명(正名), 이름을 바르게 함

논어 안연편에서 공자는 정치를 하면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반드시 "이름을 바로 잡겠다(正命)"고 하며 이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답게 행동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는 단지 자식을 낳는 것만으로 되지 않고 가장으로서 가족 혹은 자녀를 위해 책임과 도리를 다할 때 비로소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은 모든 이름에는 그에 부합한 이데아가 있다는 말로써 '그 이름에 걸맞는 행위'가 따라야 한다.

사람다운, 아름다운 사람

임금이든 신하든, 아버지든 아들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 직책과 이름에는 '사람'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따라서 사람다운 사람, 이상적인 사람이 임금이 되면 임금다운 임금이 되고, 신하가 되면 신하다운 신하가 되며, 아버지가 되면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된다. '답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명제는 '사람답다'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사전적 의미는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며 사는 동물'이란 의미다. 그러나 우리가 '저건 사람새끼도 아니야'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럴 수가 있어?' '사람이 됐다'라고 말할 때의 사람은 위와 같은 사전적 의미의 사람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즉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 됐다'라는 말을 쓴다.

종교나 교육의 목적도 실은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데 있다. '-답게' 운동의 최종 목표도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바로 이 '아름다운 삶'에 모든 종교의 공통분모가 있다. 그러면 종교인이 닮아야 할 이상적인 사람, 아름다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상적인 종교인

각 종교마다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일 것이다. 유교는 공자요, 천도교는 수운 최제우 대선사, 원불교는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이다. 이처럼 각 종교마다 가장 사람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은 그 종교의 교조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가장 이상적인 종교인을 꼽으라고 어떨까. 이는 아마 고유명사로서의 교조의 이름보다는 동사형으로서의 교조의 이름을 분석해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Christian)은 나자렛의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사람을 말한다. 이는 히브리어로 '메시아'(구세주)라고 한다. '메시아'란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요즘말로 고통 받는 민중을 구해주는 위대한 지도자를 뜻한다. 그 메시아의 가르침은 '네 하나님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불교는 '붓다'(Buddha)로서 깨달은 자를 말한다.

이처럼 그리스도나 부처의 이름은 각각 다르나 '구세주'와 '깨달은 자'란 의미로 보면 훨씬 가까워진다. 예수는 이웃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인류가 죄고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강조했고, 석가모니는 그의 깨달음과 자비심으로 인류를 죄고에서 벗어나게 하는 구원자의 역할을 했다. 동학 최수운 대선사의 인내천(人乃天), 즉 만민평등의 사상 역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사랑의 가르침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종교의 외피와 본질을 잘 구분할 필요가 있다. 곡식이나 열매가 있어서 껍질이 내용을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우리 몸에 더 중요한 것은 껍질 안에 있는 영양분이다. 그런데 우리가 때로 껍질의 차이 때문에 소중한 내용물을 외면하고 섭취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아름다운 삶

오늘날 우리가 맡고 있는 각각의 직책과 이름에는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소명이 있고, 우리의 영혼 속에는 그 직책의 이상형 즉 이데아를 닮고자 하는 이성이 있다. 지도자는 지도자로서, 국민은 국민으로서,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자식은 자식으로서 우리 모두가 '답게' 살자는 것도 결국 각자의 맡은 바 직책과 위치에서 지향하는 이상형, 즉 이데아를 닮아가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답게 살기 중의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며 그 사람다움의 최고 이상형은 각 종교의 교조의 삶 속에서 구현되고 있다. 교조답게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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