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20주년, 재즈풍 민요로 돌아오다

▲ 소리꾼 김용우는 데뷔 20주년을 맞아 정통 정가 십이난간과 재즈풍 민요 노들강변을 새롭게 선보였다.
1996년 퓨전 국악 앨범 '지게소리'로 혜성같이 등장한 소리꾼 김용우(48). 당시 정통 국악계에 생소하고 파격적인 퓨전국악으로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다. 그의 첫 앨범이 '대박' 나면서 언론계는 물론 문화계에서 대서특필되며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그의 인기는 요즘의 아이돌 못지 않았다. 대충 어느 정도였는지는 느낌이 온다. 그런 그가 데뷔 20주년을 맞아 정통 시조 음반 '십이난간'과 이와 완전히 대비되는 '노들강변'을 들고 나타났다.

'노들강변'은 국악기가 없는 국악으로 파격에 가까운 음반을 선보인 것이다. 온전히 트럼펫, 트럼본, 색소폰 등 서양악기로 연주되는 '노들강변'은 우리 민요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한다. 홍제동에서 그를 만나 음악세계와 삶, 소리꾼의 내력 등을 들어봤다.

그는 문화관광부 선정 2001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KBS국악대상 민요부문 대상, 2006년 문화예술위원회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한 바 있다.


- 국악은 언제부터 접했나
난계 박연 선생의 고향이 충북 영동군이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부터 피리를 익혔다. 난계 축제를 통해 국악을 처음 접했고, 이를 계기로 피리를 본격적으로 배우게 됐다. 가족 중에 국악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고향 영동에서도 유일하게 국악 하는 사람이다.

서울대학교 국악과에 입학하고서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피리보다는 노래를 많이 불렀다. 전경들이 강의실까지 쳐들어 올 정도로 험악했던 민주화 투쟁의 시대였다. 그 당시 박종철, 이한열 열사가 죽었으니 학내 분위기도 그렇고, 나도 자연스럽게 운동권 노래, 민중 노래를 많이 부르게 됐다. 노래 동아리 메아리 회원으로, 본격적인 소리를 시작하면서 인생의 항로를 바꿨다.

- 서울대학교 시절에도 민요에 관심이 많았는데
노래를 본격적으로 해 봐야겠다는 생각은 현장의 민요를 채집하러 다니면서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민요들을 녹음하고 채집을 했다. '이 민요 참 멋지고 아름답다'고 생각한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면서 대가 끊기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래도록 소중하게 계승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불려져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됐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1996년에 발표한 '지게소리'이다. 그냥 이 음반을 내봐야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기획했다. 그런데 속된 말로 대박이 났다. 우리 민요를 서양악기, 피아노, 베이스, 아카펠라 등이 어울리면서 색다른 국악을 선보인 것이다.

- 언론에서 크게 주목받지 않았나
그 당시 신문에서는 작은 사이즈의 가십 면이 아니라 한판을 다 할애하면서 대서특필 할 정도였다. 국악계의 조용필이다, 신세대 소리꾼이다 하면서 국악계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크게 반향을 일으켰다.

- 소리꾼으로 데뷔한지 20주년이 됐다
처음 소리를 시작할 때는 정가로 입문했다. 데뷔 20주년을 맞아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의미로 '십이난간'이라는 정통 정가 앨범을 냈다. 지난 5월 달에 발매한 '십이난간'은 퓨전 국악이 아니다. 음반 자켓 그림도 직접 배운 민화로 디자인 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경기민요를 기반으로 한 '노들강변'이다. 신민요인 노들강변을 타이틀로 해서, 사발가, 방아타령, 태평가 등 경기민요를 국악기는 전혀 안 쓰고 서양악기로만 연주했다. 노래만 국악이고 연주는 서양악기로 옷을 입혔다고 볼 수 있다. 재즈트럼펫을 전공한 네덜란드 출신의 윱 반 라인(Joep van Rhijn)과 뉴욕 퀸스 칼리지에서 재즈 작곡을 전공한 진수영과 작업을 함께했다. 노들강변은 1934년 발표된 신 민요다. 그래서 그런지 노들강변의 곡을 듣노라면 서구의 신 문명이 들어와 있는 경성의 어느 카페를 떠올릴 것이다. 일제강점기 억압받던 민중들의 한이 있는 반면에 다른 한쪽은 서구사회를 동경하는 젊은이들이 연상될 수 있다. 선율이 주는 편안함과 재즈라는 장르가 주는 세련됨이 음악에 빠져들게 한다고 평가하더라.

▲ 소리꾼 김용우가 민화 형식으로 그린 십이난간 앨범

나머지 3번째 작업은 남도민요다. 올해 안에 앨범을 만들어 내기는 어려울 듯하다. 어차피 죽을 때까지 소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준비가 되는 대로 내년 쯤 계획하고 있다. 남도민요는 창법이 달라서 소리꾼들이 잘 안하려고 한다. 발성도 다르고, 목 쓰는 법도 다르고, 길도 다르다. 그래서 어려워라 한다. 예술가는 남의 눈치를 보면 자기 세계를 구현해 낼 수 없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고, 환경이 준비가 되면 작업을 한다. 이렇게 데뷔 20주년을 맞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 온 것은 내가 하고 싶고, 원하는 것을 했기 때문이다. 이 열정이 나를 이 자리까지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 퓨전 국악이 국악계의 반발을 사지 않았나
지금은 퓨전 국악이 대세로 흔한 음악이 됐다. 그런데 내가 데뷔할 때만 해도 정통 국악을 추구하는 경향이 매우 강했다. 사실 내가 퓨전 국악을 해도 소리의 내용은 민요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충분히 정통 민요를 잘 할 수 있는데 왜 하필 퓨전 국악이냐고 하는 충고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주변의 눈치에 개의치 않는 성격이라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어서 좋았다는 대중의 평가가 있었다. 첫 번째 음반이 그렇게 성공할 줄 몰랐다. 파격적인 국악의 등장에 대중들은 환호했고, 쉬우면서 세련된 국악에 매료된 듯 했다. 다시 말하지만 내용이 중요하다. 왜 퓨전 국악이냐 하는 질문에 답한다면 옷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답하고 싶다. 내용이 민요이기 때문에. 내가 더욱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국악기든 서양악기든 간에 어울림이다. 노들강변의 앨범은 국악기를 전부 빼버리고, 트럼펫, 드럼, 색소폰, 피아노, 베이스 등이 파격적으로 배치해 봤다.

- 요즘 국악의 흐름은 어떤가
여전히 정통 국악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더불어 퓨전 국악을 하는 소리꾼도 많아졌다. 정통 국악만 가지고 먹고 살기 힘들기 때문에 퓨전 국악 등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 같다. 노래에는 정년이 없어서 실력으로는 원로 선배들과 비교가 안된다. 그래서 젊은 국악인들은 실험적인 국악에 도전하고 있다. 먹고 사는 문제와 결부가 되니 자연스럽게 돈이 되는, 무대가 마련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 예술을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세상이다. 젊은 소리꾼들의 모습을 보면 거의 대중이 원하는 것을 한다. 그러다보니 국악인이 아니라 다 연예인이 된 것 같다. 대중이 원하는 소리꾼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

- 편곡의 영감은 어디에서 받는가
초창기에는 작사 작곡을 직접 했지만 지금은 전문 작곡자나 편곡자에게 곡을 맡긴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작곡하고 편곡을 하더라도 전문가를 당해 내지 못한다. 그래서 여유 시간이 있으면 소리공부를 더 한다. 다만 모든 곡의 아이디어는 내 머리 속에서 나온다. 한 곡을 편곡하기 위해서 편곡자와 수없이 많은 대화를 나눈다. 민요이기에 편곡이 더 중요하다. 원곡을 새롭게 해석해서 내 놓아야하기 때문이다.

나는 저녁형 인간에 가깝다. 곡 편곡 하나가 꽂히면 하루 종일 그것만 생각하고 생활한다. 내 머리 속에서 편곡을 거의 다 해 낸다. 영혼이 자유로워서 새벽 2시에 자고, 오전 10시에 기상한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은 메모해 놓는다.

- 데뷔 20주년 공연이 성공하길 바란다
올해 20주년이니까,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고 포부는 밝히지 않겠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창작을 계속하고 싶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몸이 엄청 아팠다. 디스크로 시작해서 온 몸이 말이 아니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 아파봐서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온 인생인데,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위해 행복하게 살련다. 싸울 필요도 없고,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맞다, 틀리다 구분할 필요도 없다. 법륜 스님의 강의를 자주 시청한다. 살면서 위로가 되는 법문을 자주 듣는다.

심플하게 살자. 하지만 단순한 삶을 유지하려면 경제적 여건을 비롯해 환경이 갖춰져야 한다.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으면서 심플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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