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덕권 교도 / 여의도교당
나는 오래 전부터 스승님이 내려주신 〈스승님 팔훈〉을 조석으로 왼다. 그 제 2훈이 '겸양 이상의 미덕은 없다'이다. 그런데 이 겸양을 내 것으로 만들기가 쉽지 않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근 30여년이 걸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칫 아는 체, 있는 체, 잘 난체 하는 마음이 고개를 쳐든다.

얼마나 닦아야 완전한 겸양이 몸에 밸 수 있을까? 우리가 살면서 목격하거나 맞닥뜨리는 여러 가지 화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겸양의 마음이 없기 때문에 당하는 것이다. 화를 자초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또는 다른 사람에게 겸손하지 못하고 양보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겸손과 양보는 곧 존경과 배려라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한껏 낮춰 겸손하다면 우병우 같은 사람도 없고, 나향욱 같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람에 대한 양보나 배려의 마음이 충만하다면 털끝 하나 범접하는 게 어찌 가능한 일이겠는가? 가정의 살림살이나 기업을 이끌어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물론 전혀 뜻하지 않게 발생하는 외부환경도 있지만 재물에 대한 겸양을 가지지 못해 결국 그 재물이 독이 되고 칼로 되돌아와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자신의 판단과 능력을 과신해 이리저리 돈을 끌어와 무리한 투자를 한다든지 뒷감당을 못할 '옥시'같은 악덕상품을 만들어 회사가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모두가 당장 눈앞의 이익만 쫓은 겸손하지 못한 결과다.

〈소학〉에 나오는 '종신양로 불왕백보(終身讓路不枉百步)'라는 글귀는 '평생 남에게 길을 양보하면서 살아도 그 손해가 백보도 안된다'는 뜻으로 겸양의 미덕을 권하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 스스로에게, 우리 이웃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겸손함으로 자신을 낮추고 양보로 남을 배려한다 해도 일생 동안 손해 볼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또 당장 손해를 보는 듯해도 과욕을 비켜 간다고 얼마나 잃을까 생각해 본다.

며칠 전 테레사 수녀의 시성식을 주재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을 봤다. 몇 년 전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몰고 온 태풍에 휩싸여야 했다. 그야말로 자발적으로 참여한 그 수많은 인파와 환호성에 못지않게 엄청난 화두를 던지고 갔다.

모든 미디어 매체들은 교황 방문 동안 그에 대한 기사 아니고는 빛을 발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교황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보여준 '겸양의 미덕' 때문이었다.

"그는 작았다. 차도 작고 숙소도 작고 방명록에 남긴 글씨까지 작았다. 그럼에도 그는 컸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낮추는 겸손이 컸고 아픈 사람을 끌어안는 가슴이 컸고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크고 깊었다"(〈중앙일보〉 백성호 기자). 이 문단 하나의 기사 속에 4박5일 교황의 행보와 인품까지 모두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교황은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저 파(低派)'(〈경향신문〉 조국 칼럼)라는 색다른 주장까지 나왔다.

프란치스코 교황! 참으로 대단한 화두를 던졌다. "이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빈다. 막대한 부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사회 · 경제적 약자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원 없이 베풀어 주었다. 격화일로에 있는 빈부격차, 소통의 부재로 갈수록 비참해지는 억울한 사람들을 모두 껴안아 주다가 교황은 떠났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런 화두를 던졌으니 앞으로 당신네 지도자들이 자신이 지적한 모든 것들을 제대로 해결하여 평화와 화합, 정의로운 세상을 이룩하는 실천을 행하라고 주문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떠난 후, 과연 대한민국은 무엇 하나라도 바뀐 것이 있을까? 청와대나 여·야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변한 것이 없는 것만 같아 더욱 마음이 무겁다.

또한 200년 전, 우리의 위대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교황에 못지않은 의미 깊은 화두들을 우리에게 던졌다. "국량의 근본은 용서해주는 데 있다. 용서할 수만 있다면 좀도둑이나 난적이라 할지라도 아무 말 없이 용인할 수 있을 것인데 하물며 보통 사람에 있어서이랴"라 했다. '화해와 평화의 바닥에는 용서가 있다'는 다산의 말씀을 교황도 인용한 것이다.

'저파'인 교황처럼 다산도 겸양만이 가장 큰 인간의 미덕임을 강조했다. 〈주역사전〉 겸(謙)의 해석에 "스스로 높다고 여기는 사람은 남들이 끌어 내리고 스스로 낮다고 여기는 사람은 남들이 들어 올려준다" 라는 말이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산의 뜻을 따르는 분 같아서 더욱 돋보였다. 실천이 없는 논리나 주장은 무용한 일이다. 오직 실천에 옮겨야만 의미가 살아난다. 태풍처럼 몰고 왔던 교황의 화두는 바로 '겸양 이상의 미덕은 없다' 다산과 교황처럼 우리 겸양의 미덕을 본받아 행동으로 옮기면 마침내 세계는 정의에 바탕을 둔 화해와 평화의 세상을 불러 올 수 있을 것이다.

참된 위인에게 오는 최초의 시험은 겸양이라 했다. 그래서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만이 겸손할 수 있는 것이다. 겸양하는 사람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를 세우는 것임을 알게 된다. 대중의 마음은 마침내 덕 있고 겸양할 줄 아는 사람을 따른다.

조금은 바보 같이 나를 낮추고, 가능한 모든 것을 베풀며, 세상을 위하여 맨발로 뛰는 정열. 겸양은 그런 것이다. 우리 그 겸양을 완전히 몸에 배게 하여 이 세상에 겸양 이상의 미덕이 없음을 보여 주면 어떨까.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