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 교수의 현대건축이야기

   
▲ 조한 교수/홍익대학교 건축학부
 
▲ 1866년 8천여 명의 천주교인이 참수 당한 이 곳은 이 후 한국 천주교 순교 성지가 됐다.
강변북로를 타고 일산 쪽으로 가다보면 양화대교 못 미쳐, 돌산 위에 자리 잡은 붉은색의 둥그런 건물이 눈에 띈다. 바로 절두산 순교성지다. 절두산은 원래 머리를 치든 누에를 닮았다고 해서 잠두봉(蠶頭峰)이라고 불린 곳인데, 용의 머리 모양을 닮았다 해서 용두봉(龍頭峰)으로도 불린 곳이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그림인 양화환도(楊花喚渡)나 양화진(楊花津)에도 등장하는데, 조선시대 수많은 풍류객들이 찾던 유명한 경승지 중에 하나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이곳에 유람선을 띄웠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까운 역사적 사건이 잠두봉의 이름을 머리 자른 산이라는 의미의 절두산(切頭山)으로 바꾸게 한다. 바로 병인년인 1866년 이곳에서 무려 8천 명에 이르는 천주교인이 참수당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미 정조 9년인 1785년에 천주교 포교 금지령이 반포되어, 서소문 밖 네거리나 새남터에서 천주교인들이 주로 처형했음에도 불구하고 흥선대원군을 굳이 절두산에서 천주교도를 처형했던 것은, 서해에서 한강을 따라 한양으로 들어오는 지리적 요충지였던 절두산이 외국에 쇄국의 의지를 알리기 적합했기 때문이다. 잘린 목은 한강으로 던져져 산을 이루고 한강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고 하는데, 그런 끔찍한 모습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면서 잠두봉을 절두산으로 만든 것이다.

당시 조선에 머무르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 역시 같이 처형되었는데,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가 프랑스 함대를 끌고 와 병인양요 발발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안타까운 순교의 역사 때문에 천주교 쪽에서는 광복 후에 지속적으로 인근 땅을 매입했고, 1966년에 병인박해 100주년을 맞아, 절두산의 원형을 변형시키면 안 된다는 조건을 걸고 공모전을 열어, 절두산의 지형과 절묘하게 잘 맞았던 건축가 이희태(1925-1981)의 안을 선정하게 된다.

절두산 순교 성지 건물을 잘 살펴보면, 우리의 전통 건축을 현대적으로 구현하려는 건축가 이희태의 노력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건물은 크게 한강 쪽 둥그런 성당과, 뒤쪽의 네모난 기념관으로 나눠진다. 성당의 둥그런 지붕은 우리의 전통 갓에서 형태를 따온 것이라면, 기념관의 아래로 처진 지붕은 우리의 초가지붕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구축적인 방법에서도 한국적인 건축을 찾았다. 예를 들어 쌍기둥들이 지붕을 받쳐주는 기념관 부분은 우리의 전통적인 목구조의 가구식 형태를 현대적으로 해석했고,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묵직한 성당 부분은 우리의 전통적인 축조 방식의 현대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기념관의 아래 부분은 경회루의 누마루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건축가 이희태의 건축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특징 중 하나로,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작아지는 형태의 열주는 안정감을 주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준다. 국립공주박물관(1971), 국립중앙극장(1973), 국립경주박물관(1974)에서도 이러한 경회루의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다.

꼭 천주교인으로서 순례의 목적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역사를 공부하는 차원에서 절두산 순교성지를 한 번 찾아봐야 할 곳이다. 바로 옆에 있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는 한국을 위해 노력하다 돌아가신 많은 고마운 외국 분들이 묻혀있는 곳이다. 요즘같이 날씨가 좋은 날, 한강변의 유명한 경승지였던 곳이자,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한 순교지에 지어진 건축가 이희태의 걸작을 통해, 자연과 인간,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를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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