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대정진기도 체험

▲ 윤현공 교도 / 원불교청운회
결혼하자마자 시어머니의 권유로 입교 하고 교당이라는 곳을 처음 가게 됐다. 모든 것이 낯선 나에게 원불교는 어색하게만 다가왔고, 특히 교당의 분위기는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남자아이들만 기르면서 핑계 아닌 핑계로 교당은 자꾸 멀어졌다.

그런데 명절에 시댁 형님들에게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교당에 '꼭~나가라'는 권유를 받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 아이들끼리 자라는 것보다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성장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기회가 닿으면 나갈 생각이었다.

마침 시댁에 인연이 있는 교무님이 집에서 가까운 교당으로 부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불교학생회 출신인 나로서는 왠지 원불교가 가슴에 와 닿지 않았지만 다행히 아이들이 동네 친구들을 몰고 다니며 교당 법회에 참석했다.

결혼 후 시어머니가 '종교는 다 같은 것이다'는 말과 함께 건네준 <원불교교전>을 펼쳐 보았다. 〈정전〉, 〈대종경〉을 천천히 읽어 가는데, 법문 말씀이 심금을 울렸다. 꼭 나를 위해 맞춤으로 설해 주는 법문 같았다.

어느 날 원불교100년 성업 대정진 릴레이기도를 구로교당에서 진행했다. 많은 교도들이 참석하지 않았지만 다른 교당에서 기도함을 건네받아 정진기도를 진행했다. 공허했던 마음이 간절한 기도문에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가슴 뭉클한 기도를 경험한 뒤 대정진기도에 동참해야겠다는 신심이 우러나왔다.

당시 이근수 청운회장은 "원불교 100년 성업을 위해 10년 기도에 동참하는 교도들은 스승님들의 유업을 계승 발전시키는 복받은 분들이다. 우리 회상이 새 문명 건설의 주역이 될 수 있도록 혈심혈성으로 대정진하자"는 말씀은 잊을 수가 없다. 인연이었는지 그 말씀에 용기내서 릴레이기도에 정성을 들였다.

세월이 흘러 청운회 간사로 입사하게 됐다. 처음 참석한 기도식에서 감동을 줬던 분이 청운회장이라는 사실에 '좋은 인연은 다시 만나는 구나'하며 반가워했다.

청운회 간사로 본격적으로 근무하면서 10년 릴레이기도 이관식이 거행되는 교구를 시간이 날 때마다 동행했다. 나뿐 아니라 청운회장을 비롯해 구로교당 김용현 교도와, 목동교당 신승국 교도가 함께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집에서 나서니 매양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각 교구 교도들도 정성스럽게 불단을 꾸미고 환한 얼굴로 맞이하는 모습을 보니 기도는 화합과 행복, 즐거움이 늘 함께 하는 것 같았다. 구부러진 허리를 부여잡고, 불단에 올라 헌공함에 기도금을 넣고 사배를 올리는 원로 교도님의 뒷모습은 신앙 그 자체였다.

또 어떤 교도는 기도금을 내면서 생색을 낼까봐 부끄러워 살짝 기도금 봉투만 쥐어줬다. 말은 안 했지만 그 정성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나를 기쁘게 한 것은 지난해보다, 지난달보다, 어제보다 더 많은 교도들이 릴레이기도에 동참했을 때다. 기도는 마음먹기에 달렸지만 참석한 교도들은 한결같이 행복한 얼굴로 교당을 나선다. 그 표정을 볼 때, 나의 행복감은 두 배가 됐던 것 같다.

서울교구에서는 매월 10일에 10년 대정진기도식을 올렸다. 기도식을 준비하고 교도들을 맞는 것은 나의 본분이었다. 매달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부부, 아픈 몸 가누면서 참석하는 교도, 봉사하며 시간 맞춰 기도식에 참석하시는 교도, 열정적으로 설법해주는 황도국 서울교구장님. 나는 신심 장한 교도들을 보면서 원불교 교도임에 자부심을 갖게 됐다.

그렇게 멈춰 있을 것 같았던 10년 기도도 해제식이 다가왔다. 해제식 때는 그동안 기도해 왔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한울안 한이치 한가족'임을 몸으로 체험했다. 어떠한 일이든지 누군가 희생하지 않고는 절대로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콩나물에 물 주듯이 나의 마음에 주르륵 흘린 기도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나의 틀에 맞춰 상대방이 변하기를 원하고, 남과 비교해 나를 괴롭혔던 마음이 사라진 것이다. 각자 각자에게 힘들고, 어려움을 주는 것은 깨달음의 은혜를 주기 위함이다. 10년 릴레이기도는 나의 마음의 키를 키워줬던 성장호르몬이었다. 모두가 은혜이고 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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